조선의 대외관계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20.09.26
- 최종 저작일
- 2019.09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태조 대 대외정책과 대명관계
2. 태종 대 대외정책과 대명관계
3. 세종 대 대외정책과 대명관계
Ⅲ. 결론
본문내용
조선초기에는 활발한 대외정벌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시기와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대외정벌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제관계, 대규모 병력과 군수의 확보방안, 작전의 효율성 등 제반 사항을 모두 고려해서 계획을 세워야만 한다. 더욱이 정벌이라는 방식의 공격적인 대외정책은 주변국과 대립을 불러올 수밖에 없고, 국내적으로도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정치ㆍ사회적 위험성이 크므로 쉽사리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정벌 당시의 상황, 정벌을 둘러싼 논의, 정벌 이면의 의도 등을 분석해 본다면, 15세기의 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역량과 대외의식의 실제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의 대외관계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리고 조선의 외교 방식 역시 ‘사대’와 ‘교린’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사대교린으로 조선초기의 국제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사대교린으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명목상 명(明)에 속해 있는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女眞)에 대한 정벌의 시행은 사대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행위가 아닐 수 없으며 여진이 결코 교린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5세기의 조선은 주변 세력에게 공격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태조 대에서 세종 대에 이르는 시기의 국왕들이 누구보다 사대를 강조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사대에 구애받지 않고 대외정책을 결정했던 상황들이 자주 나타났다. 결국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치로 인식했다기보다는 정국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하고자 했던 목적이 강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초기 대외정벌의 원인과 결과, 정벌과정에서 나타나는 조선의 대명ㆍ대여진의식 등을 살펴본다면 14~15세기 동아시아 대외관계의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