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 - 고려 개경파와 서경파를 중심으로 -
- 최초 등록일
- 2020.10.27
- 최종 저작일
- 2020.05
- 7페이지/
MS 워드
- 가격 1,5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소개글
"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 - 고려 개경파와 서경파를 중심으로 -"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고려시대 수도 개경파
3. 고려시대 수도 서경파
4. 각각의 주장에 대한 생각
5. 결론
6. 참고문헌
본문내용
I. 서론
수도는 한 나라의 중심적인 도시를 일컫는다. 이는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지역이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도에 관한 중요성은 과거 고려시대에도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움직임은 고려시대 수도 개경파와 서경파가 나뉘며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가 있다. 고려시대 수도 천도에 관한 각각의 주장을 살펴보며 가지고 있는 생각과 결론으로 오늘날의 모습과 과거의 모습,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II. 고려시대 수도 개경파
고려시대의 개경파는 기성 문벌 귀족 세력으로서 사상은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신라 계승 의식의 성격을 지녔다. 건국 초기에는 진취적, 자주적인 성격을 보였지만 시간이 흘러 기반이 굳어지자 점차 보수적인 문벌귀족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여 권력을 바탕으로 집권하던 세력이며 고려시대 귀족사회를 이끈 특권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고려시대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띄었고, 권력을 이을 수 있는 유력한 가문끼리 폐쇄적인 혼인 관계를 구축하여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왕실과의 지속된 혼인으로 외척의 권력이 비대해 졌으며 대표적인 인물인 이자겸은 왕좌를 찬탈할 야망까지 품을 만큼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개경파의 주장은 간단하다. 정치적이나 지위, 재력적으로도 특권을 누리는 자신들의 특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천도를 반대한 것이다.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서 왕권의 약화가 있었고 외적으로는 금나라의 압박도 있었다. 고려시대의 사회가 내적 외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시기에 풍수지리 사상이 떠오르면서 한 승려가 서경으로 천도를 주장하였고 이를 아니꼽게 본 문벌 귀족세력은 당연히 반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자겸이 가졌던 권세를 탐했고 그 권력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개경파와 서경파는 성향이 정반대였다. 종교는 물론이고 금나라를 대하는 성향도 달랐다.
참고 자료
최지은(2009). 고려사 기록과 교과서 서술 비교분석 – 묘청의 난과 삼별초의 난을 중심으로 – 울산대학교 교육대학원. 박사학위논문.
박종덕(2019). 고려시대 풍수지리사상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매일경제(2017). 사대주의자인가, 역사의 기록자인가 ‘김부식’ ‘오만한 천재’가 ‘성실한 둔재’보다 못하다. 03월 30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네이버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