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병철회장과 현대 정주영회장의 기업가 정신 비교
- 최초 등록일
- 2021.01.13
- 최종 저작일
- 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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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성 이병철회장과 현대 정주영회장의 기업가 정신 비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1. 이병철 회장에 대하여
2. 정주영 회장에 대하여
Ⅱ. 본 론
1. 이병철 회장의 리더십 특징
2. 정주영 회장의 리더십 특징
3.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리더십 비교
Ⅲ. 결 론
1. 이병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
2.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 정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병철 회장은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먹을 걱정과 입을 걱정 한번 없이 유복하게 지낼 수 있는 대지주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9월에 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중동학교 속성과 1학년에 입학,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인해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중동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 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됐다고 한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심한 건강 악화로 인해 1학년 때 자퇴를 결정하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건강을 회복한 뒤 26살쯤 부친에게 쌀 300석 분의 토지를 받아 첫 사업인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첫 사업에서부터 사업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의 자본금만으로는 적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지인 2명을 더 불러 사업을 시작하여 마산에서 제일 큰 정미소를 첫 사업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한 후 큰일 없이 잘 흘러가고 있었지만, ‘중일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사업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다. 중일전쟁으로 인해 쌀 배급제를 시작하였고 이병철 회장의 협동 정미소뿐만 아니라 거의 전국에 모든 쌀가게 들은 문을 닫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첫 번째 사업은 예상치 못한 외부의 일로 인해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첫 번째 사업이 흥하지 못하였다고 포기하였다면 지금의 삼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위기를 또 다른 성장의 기회로 잡았다.
그 뒤 1938년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여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호암자전 – 저자 : 이병철
이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정주영 – 저자 : 정주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저자 : 정주영
기업비사 1회 삼성 이병철 회장 ( https://www.youtube.com/watch?v=RVibuHVpIcA&feature=youtu.be )
기업비사 41회 세기의 라이벌, 이병철과 정주영이 만든 기적 ( https://www.youtube.com/watch?v=Vz67wo0yjMY&feature=youtu.be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주영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341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병철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