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관점 비교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21.03.22
- 최종 저작일
-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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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2015년 역사 수업 관련으로 작성한 리포트입니다. 묘청의 난을 혁신으로 볼 것인가, 반란으로 볼 것 인가에 관해 고찰한 글입니다.
목차
1. 서론
2. 역사서에 나타난 묘청의 난
1) 『고려사』에 나타난 묘청의 난
2)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묘청의 난
3. 묘청의 난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
1)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에 나타난 묘청의 난
2) 『고려사』·『고려사절요』와 다른 관점과 이유
4. 결론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른바 ‘묘청의 난’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고려 인종 13년에 묘청 일파가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약 1년여 동안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 1126년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는 정치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졌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을 받으며 매우 불안한 정세 속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 속에서 승려 묘청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부패한 개경 귀족 세력을 타파하고 서경 중심의 새 정권을 세우고자 풍수지리설에 의거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묘청은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개경의 지덕이 다했기 때문이며 나라를 중흥하고 쇠약한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군주를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도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연호를 써야 한다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이야기하며,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많은 나라가 조공을 할 것 이라고 주장했다. 윤언이, 정지상, 백수한 등의 서경 출신 관료들이 묘청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당시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문벌 귀족 세력들에게 싫증이 나 있던 인종은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 천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인심을 현혹시키는 속임수가 발각되고 재앙이 자주 생겨 서경천도계획을 반대하는 여론이 고조되어갔고, 서경천도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일파는 국호와 연호를 새로 지정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과 서경에 와 있던 상경인들을 잡아 가두는 등 1년여 동안 항쟁했으나,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에 의해 묘청 일파는 죽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참고 자료
경향신문, 1986.03.11자.
김종서 외 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임창재 역. 한국고전번역원, 1968.
정인지 외 저. 『고려사(高麗史)』. 북한사회과학원·허성도,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묘청의 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6362&cid=46621&categoryId=46621, 20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8788&cid=46623&categoryId=46623,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