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육당 최남선 선생과 조선사편수회사업"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최남선의 가계와 생애
Ⅲ. 조선사편수회
Ⅳ. 맺음말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육당 최남선(1890-1957)은 그가 12세인 1910년에 한일합방을 맞이하였으며, 30세 되던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하였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법정에 서야했다. 신문화운동의 기수, 독립선언서의 기초자, 친일파 등 다양하게 굴절된 그의 모습이 또한 그러한 시대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은 비단 육당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온 지식인의 한 단면이기도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일제하 지식인들이 처한 상황과 대응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최남선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이 문학사적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그의 전기와 그를 일방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학문적 차원에서의 평가는 민족주의 사학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평가는 민족주의 사가들과 비교를 통하여 이루어졌을 뿐 그의 역사의식과 사학자체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그의 저술을 바탕으로 한 평가가 시도되기도 했으나 아직은 연구 성과가 소수일 뿐이다. 최남선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의 근대주의 및 신문화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의 친일행적에 관한 논문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그의 ‘친일’이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두어 그의 모든 활동을 부정해버림으로써 객관성을 잃고 있다. 이와 같이 그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살아온 시대만큼이나 다양하다. 이는 물론 그의 파란만장한 행적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정리되어있지 않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의 고대사 연구 중에 단군연구에 주목하려고 한다. 그의 친일 행적 중에 주목할 부분은 1928년부터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최남선의 조선사편수회 활동에 대한 평가는 친일 행위로 판단되어 비판적인 인식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후에도 단군의 문화적•역사적 역할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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