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서재필의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서재필의 생애와 개화사상
Ⅲ. 갑신정변
Ⅳ. 미국에서의 삶
Ⅴ.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
Ⅵ.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Ⅵ. 맺음말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서재필徐載弼은 개화의 선구자이자 혁명가·언론인·의사·외교관·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한 실천적 개혁사상가였고, 한말韓末 정치적 격동 속에서 파란만장한 길을 겪게 된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고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후 미국에서 동아와 독립협회 獨立協會 창설하고 3·1 운동 직후 독립 외교 활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일생에 걸쳐 민중들에게 개화된 사상과 발전상을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실천적 개혁가로 살았다.
Ⅱ. 서재필의 생애와 개화사상
서재필은 1864년 1월 1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있는 외가에서 아버지 서광언 徐光彦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중엽은 국외로는 영국英國·미국美國·프랑스를 비롯한 서양 제국들이 동양으로 한창 세력을 확대하고 국내에서는 고종高宗이 즉위하고 실질적인 왕권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행사하고있었다. 그리고 대원군은 국내에서는 개혁을 단행하고 국외로는 쇄국정책을 사용하여 청을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교류와 통상을 반대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7살 때였던 1871년 무렵 7촌 당숙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갔고, 입양된 지 얼마 지나지않아 양어머니의 권유로 수도에 있는 외수촌 김성근의 집에 보내져 공부하게 되었다. 그 무렵인 1873년 11월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대원군이 물러나고, 대외정책에서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문호의 개방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본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된다. 개항후 조선 정부는 개화를 지향하였느나, 위청 척사파 즉, 유생들의 반발로 개화를 생각처럼 추진하지 못하고있었다. 서재필은 이런 혼란 속에서 근대화를 추구하던 개화파인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박영효朴泳孝 등과 어울리며 외국의 사정과 근대적인 지식을 접하게되었는데, 중국에 대한 사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중 략>
참고 자료
홍선표, 1993,「徐載弼의 獨立運動(1919-1922) 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오수열, 2010, 「송재(松齎) 서재필의 생애와 정치이념」, 『서석사회과학논총』
김승태, 2013. 『독립협회를 창설한 개화, 개혁의 선구자 서재필』, 역사공간
오세응, 1993,「서재필의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 고려원
강만길, 1999,「고쳐쓴 한국근현대사」, 창작과 비평
국사편찬위원회, 1999,「한국사 41(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이정식, 1984,「서재필」, 정음사
이정식, 2003,「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출판부
박노자, 2005, 「우승열패의 신화」, 한겨레 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