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르네상의 문을 연 메디치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성장하는 피렌체
(1) 모직업을 통한 성장
(2) 금융업을 통한 성장
(3) ‘개인’의 발견
2. 메디치 가문
(1) 메디치가를 일으킨 조반니
(2) 피렌체의 국부 코지모
(3) 위대한 로렌조와 가문의 몰락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꽃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피렌체는 르네상스 운동의 발상지로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르네상스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예술가와 학자들의 가능성을 믿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던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피렌체에서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메디치 가문이 여러 분야의 예술가, 학자를 모아 공동 작업을 후원함으로써 문화 창조 역량을 이끌어 낸데서 ‘메디치 효과’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렇게 르네상스 촉발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메디치 가문과 그들이 후원하여 만들어진 건축물들을 중심으로 피렌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성장하는 피렌체
(1) 모직업을 통한 성장
유럽대륙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자연스럽게 동서 무역의 중개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항구도시인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 등이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중개무역에 앞장섰고, 내륙에 위치한 피렌체는 인근도시의 항구를 이용해 지중해무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주요산업은 ‘모직업’으로, 모직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고급 양털을 주로 영국에서 수입해왔다. 모직업이 피렌체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피렌체인들은 양모 거래를 위해 자체적으로 지중해로 나가는 길목을 확보해야 했다.
그들은 토스카나 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피사를 탐내다가 결국 1406년, 거듭된 공격 끝에 피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지중해와 대서양으로 직접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해로가 개척되었고, 안정적인 수출입의 물류가 확보되어 모직산업의 발전이 더욱 확대되었다. 때마침 흑사병으로 급격하게 감소했던 유럽의 인구가 빠른 회복세를 보이면서 의류산업이 팽창하고 있었다. 피렌체 상인들은 영국과 네덜란드 지역에서 양모를 수입해서 염색하고 가공한 옷을 전 유럽으로 되파는 무역업으로 큰 수익을 올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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