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 공민왕의 반원개혁과 신진사대부의 대두
- 최초 등록일
- 2004.06.05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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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말 열심히 썼습니다
각 자료를 공민왕, 신진사대부 단원별로 따로 사용하셔도 될 정도로 자세하게 정리해 놨습니다.
목차
Ⅰ머리말
Ⅱ공민왕의 집권과 정치세력의 변천
1.공민왕의 개혁정치
(1)공민왕의 집권과 개혁의 시작
(2)반원정책
(3)왕권강화
Ⅲ신돈의 개혁과 신진사대부의 대두
1.신돈의 개혁
(1)신돈의 등장과 배경
(2)신돈의 개혁
(3)신돈의 제거
2.신진사대부의 성장과 분화
(1)신진사대부의 등장
(2)신진사대부의 성장
(3)신진사대부의 분화와 조선 건국
*참고자료 공민왕의 개혁을 방해한 세가지 걸림돌
(1)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홍건적
(2)고려안의 적들
(3)아내를 잃은 슬픔
Ⅳ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원(元) 간섭기 이후 고려(高麗)사회는 외세 종속구조가 오랜 기간 종속됨으로써 사회모순이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당시 사회모순은 12세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던 고려사회 본래의 내적 모순과 원의 간섭으로 말미암은 외적 모순이 중첩된 것이었다. 토지점탈, 수취체제의 문란, 국가 재정난, 민의 궁핍화, 파행적 정치운영 등은 당시 사회모순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지배세력의 토지점탈과 수취체제의 문란은 국가재정난과 민생문제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원의 요구가 추가됨으로써 재정 수요가 늘어난 반면, 토지겸병의 확대로 국가 수조지는 줄어 왕실과 정부는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광철, 「고려후기 개혁정치와 정치세력」, 『고려시대사 강의』, 늘함께, 1997
사회모순의 심화는 모순의 피해자인 백성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그래서 민은 독립적 생활기반을 잃고 국외로 유망하던가, 지배세력의 농장에 투탁하여 예속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김순자, 「원간섭기 민의 동향」, 『역사와 현실』7, 1992
정치운영 또한 국왕이 외세를 배경으로 왕위를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측근정치가 출현함으로써 파행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공민왕(1351~1374)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개혁교서를 발표하고 실제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혁정치를 실시하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존에 있던 부원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가진 계층을 수용하였으며, 원의 간섭에서도 벗어나기 위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무력으로 빼앗는 등 고려의 자주성을 드높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원으로부터 자주성을 가지며 국력을 회복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공민왕이 집권 이후 편 초기의 반원정책과 사회모순의 해결 방안, 공민왕 15년 신돈이 집권한 이후 실시한 본격적인 개혁정치 그리고 공민왕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