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전통사회의 구조] 조선 시대 족보의 이데올로기
- 최초 등록일
- 2004.07.03
- 최종 저작일
- 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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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금 어려운 대목입니다만, 저 나름대로 공들여서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부탁드리고, 꼭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목차
1. 머리말
2. 족보의 이데올로기
1) 양반이라는 특권층에 대하여
2) 그렇다면 왜 양반들은 조선후기에 족보를 만들었는가?
3) 족보와 호적의 차이점 그 이데올로기
3. 마치면서
본문내용
이처럼 족보는 매우 양반의 자기 과시적인 성격이 강했던 산물로 볼 수 있겠다. 족보가 부계혈연관계보다 혼인관계까지를 모두 포함한 종법관계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은 이리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하겠다. 전기에는 혼인관계를 중시해 외손까지도 족보에 크게 기재하면서 가문의 위세를 높이는데 목적을 더 두었고, 후기에는 양반들 자신의 권위가 위협받을 시점이 오자, 적서를 강화하며 적자 중심의 족보를 만들었다. 족보를 통해 양반의 권위를 높이고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족보에 대해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특히 종손 등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철저한 부계 중심의 기록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족보는 가문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는데 더 큰 중점을 두었었고, 가문의 위세를 드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 혼인관계와 외손까지도 아주 세세히 기록을 다해 두었다.
족보에서 드러나는 여성 차별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예전 족보에는 딸까지도 자세히 기재가 되었으며,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족보를 꾸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일이다. 호적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주지 확인의 개념이던 호적이 지금은 가부장제의 뒷받침이 되는 하나의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예전에는 호적이 주민등록등본 이상의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참고 자료
대동문화연구원, 『호적은 통해 본 단성지역의 사회계층』, 성균관대학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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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근, 『한국사는 없다』, 사람과 사람, 2001.
정진영,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2003.
차장섭 외, 『한국사 시민강좌 제 24집』, 일조각,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