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효종] 효종의 북벌론
- 최초 등록일
- 2004.08.22
- 최종 저작일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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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1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사회의 변화
1-2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2. 효종의 즉위와 山林의 등용
3. 북벌론의 대두와 전개
4. 효종당시의 국내 사정
5. 북벌론의 허와 실
본문내용
병자호란의 결과 인조는 최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에 따라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항복한 조선은 청과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을 것, 명과의 관계를 끊을 것, 왕자와 대신 자제를 인질로 파견할 것, 조선은 청에 대해 세폐를 납부할 것, 경조사절 파견, 명나라 공격시에 원병을 파병할 것 등의 약정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가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 외에 무려 50여만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정묘호란은 일단락 되게 되었다.
이러한 호란의 커다란 상처를 입은 조선은 안팎으로 일대 변혁의 시점을 맞게 되었다. 즉, 당시 조선은 두 가지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외부세계에 대해 문을 닫고 기존의 질서, 기존의 사상을 고수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명분을 접고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으로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길이었다. 즉 친명반청 정책의 추진이냐, 아니면 친청정책을 추진할 것이냐의 귀로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의 등극 배경자체가 친명반청 의식속에서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일으킨 것이기에 친청의 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친청 정책의 추진은 곧 인조자신이 반정을 일으켜가면서 얻은 자신의 왕권에 대한 정통성을 상실하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산성의 굴욕적인 항복 역시도 인조가 청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조정의 대신들도 인조를 도와 반정에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철저한 소중화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철저하게 성리학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친청정책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당시의 조선 조정의 정세는 적극적인 반청의식이 팽배해 가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