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 - 세도정치기] 세도정치
- 최초 등록일
- 2004.08.22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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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세도정치의 의미
2. 세도정치의 시대적 배경
3.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4. 헌종대-풍양 조씨 세도기
5. 철종대-안동 김씨 세도기
6. 암흑 속의 빛 - 민중의식의 성장
본문내용
조선시대 왕의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을 받아 전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일인 세도정치는 그 형태에 있어서 정조이전과 이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조 때 홍국영이 세도(勢道)정치를 하기 전의 <세도(世道)>는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士林)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 교화원리로서의 세도는 조광조(趙光祖) 이래 정권을 담당한 사림이 실천해야 할 책무로서 자임한 정치형태였고, 이와 같은 정치자세의 정당성은 사림정치의 권위를 원칙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단순한 정치권력보다는 어떤 지도이념과 공정한 언론을 주체로 하여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 잡으려는 면이 있었으므로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학식이나 덕망을 가져야만 되었고, 따라서 왕도 높은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 예를 들면 중종 때의 조광조는 교학의 최고인 지성균관사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효종․현종때의 송시열은 예조참판에서 신임을 받기 시작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뒤에 우의정 좌의정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세도>의 신임과 위임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치세의 도리를 주장하여 정신적으로 왕을 보좌하기보다는 실지로 정치권력의 행사를 위임받아 권세를 부리는 정치의 형태로 변질되면서 일반적으로 종전의 세도(世道) 대신 세도(勢道)라고 흔히 일컫게 되었다. 즉, 정조 때의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정후겸․홍인한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공으로 도승지겸 금위대장에 임명되어 왕의 신변보호를 맡은 한편 모든 정사도 그를 거쳐 상주(上奏)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또한 정치기반을 굳히기 위해 누이동생을 정조에게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았고, 궁중의 숙위소(宿衛所)에 머물면서 관리의 임면(任免), 왕명의 출납, 군기국무(軍機國務)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사를 좌우함으로써 <세도재상>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그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왕의 친정(親政)을 바라는 사림의 여론으로 4년 만에 추방되어 일단 세도정치가 종식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12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은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이듬해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다시 외척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철종 때까지 약60년 동안 계속되었다. 홍국영 이후 세도정치의 특색은 대개 척신으로서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면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지명되었으며, 치세의 도리보다는 상하의 민정과 신임의 동향을 조사 보고하고 인사행정에까지 직접 참여하여 권력의 남용을 초래함으로써 외척의 발호를 보게 된 데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