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서쪽에 광주가 있다.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뻗어내려 한강 남쪽에 가서 된 고을로, 광주의 성읍은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이다.
- 최초 등록일
- 2024.02.22
- 최종 저작일
-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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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주 서쪽에 광주가 있다.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뻗어내려 한강 남쪽에 가서 된 고을로, 광주의 성읍은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이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2
Ⅱ. 동구릉(東九陵) 20
본문내용
Ⅰ.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1. 남한산성
1-1.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
여주 서쪽에 광주가 있다.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뻗어내려 한강 남쪽에 가서 된 고을로, 광주의 성읍은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이다. 성 안쪽은 낮고 평평하지만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칼날[刃]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인조가 그 성에서 내려와 항복한 것은 양식이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강화가 결정된 뒤에도 남한산성은 외적을 막아줄 중요한 요충지라고 여긴 인조는 성안에 아홉 개의 절을 세워 승려들을 살게 하고 총섭(總攝)한 사람을 두어 승대장(僧大將)으로 삼았다. 해마다 활쏘기를 시험하여 후한 상을 주는 까닭에 승려들은 오로지 활과 화살로써 일과를 삼았다. 조정에서는 나라 안에 승려가 많은 까닭에 그들의 힘을 빌려 성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성안은 그리 험하지 않지만 성 바깥 산 밑은 살기를 띠었다. 또 중요한 진(鎭)이라 만약 사변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전쟁터가 될 지역이므로 광주 일대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이처럼 『택리지』에 광주의 형승이 “한수(漢水)의 남쪽에 토양이 기름지다”라고 실려 있고, 고려 말의 문신인 유백유는 “빼어난 기운은 정기를 저장하여 준걸을 낳았으니, 조선 인물의 빛이 있구나.”라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았는데, 안정복에게서 배운 정약전, 정약용, 홍유한과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광주를 기반으로 그들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이곳 광주를 두고 여러 말들이 전해져온다. ‘광주 사람들은 남한테 돈을 꾸지도 않고 빌려주지도 않지만 광주 사람한테 돈을 빌리면 안 갚고는 못 배긴다.’는 말은 그만큼 기질이 세다는 뜻이다. 또 ‘광주 생원 첫 서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광주 촌 영감이 서울에 처음 가서 어리둥절하듯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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