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槐山) 개관 원풍리 마애불좌상(보물) 김홍도 유적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유적
- 최초 등록일
- 2024.02.25
- 최종 저작일
-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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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괴산(槐山) 개관 원풍리 마애불좌상(보물) 김홍도 유적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유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괴산(槐山) 개관 2
Ⅱ. 원풍리 마애불좌상(보물) 4
Ⅲ. 연풍성지 5
Ⅳ. 김홍도 유적 8
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유적 14
홍명희의 삶의 자취 · 인간성과 사상 · 『임꺽정』의 민족 문학적 가치 · 홍명희의 유적
Ⅵ. 각연사(覺淵寺) 23
각연사 창건연기 · 석조비로자나불(보물) · 대웅전과 닫집 · 통일대사 탑비(보물) · 각연사 돌거북
본문내용
Ⅰ. 괴산(槐山) 개관
1. 괴산의 지명 유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무렵 가잠성을 지키다 순국한 찬덕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김춘추가 하사한 괴산의 옛 이름인 괴주(槐州)가 이후 지금의 괴산으로 불리게 된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접경지대로서 백제와 신라 고구려 사이에 충돌이 잦았던 곳이다. 신라 진평왕 28년(606)에 신라장수 찬덕이 가잠성을 지키고 있을 때 백제의 대군이 침입 백 여일을 포위 공격하였다. 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신라에서 여러 번 원군을 보냈으나 그 때마다 번번이 패하게 되고, 성 안은 식량과 물이 떨어지고 군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성주인 찬덕이 의롭게 싸우다 죽을 것을 역설하였으나 군사들은 항복하여 목숨을 보존하길 원하였다. 찬덕은 운명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닫고 “너희들은 내가 죽은 후에 항복하라. 나는 죽어 귀신이 되어 백제 놈들을 잡아갈 것이다.”라고 외친 뒤 장렬하게 죽었다. 후에 이 소문을 들은 김춘추는 찬덕장군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서 가잠성을 괴주(槐州)라 부르게 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괴산(槐山)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라고 전해진다.
괴산(槐山)이라는 의미가 언뜻 듣기에는 괴이한 산이 많은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괴산은 홰나무 괴(槐), 즉 느티나무를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지칭하는 괴부(槐府), 왕궁을 지칭하는 괴신(槐宸),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정원을 괴원(槐院)이라 부른 것 등을 보면 괴(槐)자는 아무렇게나 쓰여지는 글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괴(槐)자는 어느 분야 혹은 인물이나 지명 등이 으뜸이라는 것을 나타낼 때 쓰여지는 글자인 것이다.
2. 괴산의 역사
2-1. 선사시대
괴산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삼국사기』인데 이미 선사시대 이래로 일정한 주민들이 거주했음을 여러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간돌검, 돌도끼, 돌화살촉이 있으며 고인돌(支石墓)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