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외항쟁(수.당중심)
- 최초 등록일
- 2004.10.22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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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5.6세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2. 고구려와 수의 전쟁
3. 고구려와 당의 전쟁
4.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북제와 북주의 상쟁은 575년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끝났다. 그리고 이어서 북주 내부에서 정권에 교체되었다. 581년에 양견이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를 건국한 것이다.
수(隋) 문제(文帝)는 즉위한 뒤 인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하고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수서』에는 문제의 통치시기를 일컬어 “절약에 힘쓰고 부역을 균평하게 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법령이 잘 시행되어 군자는 모두 살아감을 즐거워했고, 백성은 각기 그 생업에 안정을 찾아 … 20년 천하가 무사하더라.”고 평하였다. 당나라가 수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도 수나라 때 저장해 놓은 피륙을 20여 년 간 사용했다 하니 당시 수나라의 경제 번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중국 측의 기록이기 때문에 믿을만한 것은 못되지만 미화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수가 당시 상당한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의 국력 강화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수는 589년에 진을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5세기 이후 안정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상쟁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 세력이 통일됨으로 인해 국제 질서는 급속히 변동되었다.
진의 멸망 소식을 접한 서쪽의 토욕혼 4세기 중엽 이후 7세기까지 청해성[靑海省] 및 감숙성[甘肅省] 남부를 지배한 몽골계 유목민인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나라.
은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 방어책을 모색하였다. 또 중국의 최대 적대세력인 북방의 돌궐도 상당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끝내 수에 순종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구려 휘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수로 이탈해 갔고, 고구려 세력 아래 있던 말갈족의 이탈이 늘어났다. 또한 백제와 신라도 수에 조공하며 관계를 맺었다. 노태돈,「5~6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p353
참고 자료
1) 강만길,『한국사4』, 한길사, 1994
2) 노태돈,『고구려사 연구』,사계절, 2000
3) 변태섭,『한국사통론』, 삼영사, 1986
4) 이기백,『한국사 시민강좌2』, 일조각, 1988
5) 이기백,『한국사신론』, 일조각, 1967
6) 이덕일,『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
7)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1』,경제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