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홍난파] 홍난파, 음악인인가 친일파인가
- 최초 등록일
- 2004.10.23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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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홍난파의 음악인생
3. 나오는 말
본문내용
2. 홍난파의 음악인생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1912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하였고, 1913년부터 3년 동안 음악학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다니며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던 1918년에 일본 '도쿄음악학교'(흔히 '우에노'로 줄여 말하는 학교)로 유학하였지만, 다음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지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 평론가, 음악교육가, 지휘자, 작가로서 음악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쳐 나갔다.
1926년에는 사립인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였고, 1931년에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성악우회 주간(1919),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악회(硏樂會)를 창설(1922) 및 운영하였고,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1931)와 이화여전 음악강사(1933)를 맡기도 하였다. 난파 트리오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고,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경성방송관현악단 조직 및 지휘하며(1936),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1938)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악단 전면에 우뚝 솟았다.
그러나 홍난파의 화려한 음악활동은 일제의 '문화정치'에 상응하여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즉, 민족개량운동 쪽에서 펼친 음악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1936년 [동서양 음악의 비교]에서 “조선의 음악이 더디고 느려 해이하고 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 기분에 싸여 있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대게 경쾌하고 장중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음악을 비판하고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계몽·보급하려 하였다. 이러한 민족개량운동의 입장은 중일전쟁 이후 '친일음악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하였다. 이러한 변모는 '민족음악개량운동'이 애초부터 식민지하에서는 한계를 지녔다는 점과 '수양동우회' 사건때문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홍난파 편』, 돌베개, 1993
http://user.chollian.net/~tnsl/html/a18.htm
http://www.surname.co.kr/gim/db/gog.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