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 최초 등록일
- 2004.11.16
- 최종 저작일
- 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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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간적인 순서로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문제점, 폐해 서술, 비판했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을 건설하기 위해 모택동이 추진한 운동이었다. 소련이 수년 내 공업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흐루시초프의 허풍에서 힌트를 얻은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인민공사」를 설치하여 「대약진운동」을 시작하였다. 농민은 조상 대대의 재산을 처분하고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한편 공업생산에서는 우선 철강의 비약적 생산 증대를 추진했다. 특히 1년내 철강생산을 두 배로 늘린다는 목표가 잡혔다. 마을마다 용광로를 설치했다. 이를 위해 모든 마을에 원시적 용광로인 토법로를 만들게 했다. 불과 3~4개월만에 100만개 이상의 토법로가 건설됐다. 중국 전역은 붉게 타오르는 용광로 불빛으로 밤마다 장관을 이뤘다.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모택동은 도시와 농촌의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쉴새없이 생산됐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려야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 지도자들은 모택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고 농민들은 턱없이 엄청난 세금을 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생산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내는 바람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곳도 있었다. 더욱이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내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에게 감추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 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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