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세사 ] 낭혜와 성주산문
- 최초 등록일
- 2004.11.18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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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주사는 사적 제 307호로 충청남도 보령시 마산면 성주리에 있으며 지금은 성주산을 뒤로 하여 그 터만이 남아 있다. 백제의 법왕 때에 초창된 사찰로서 처음에는 오합사라 부렀는데 백제의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삼국 사이의 치열했던 정복 전쟁으로 솟구쳤던 백성의 원망을 달래 보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라 문성왕 때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낭혜화상: 속성 김(金). 호 무주(無住). 시호 낭혜(郞慧). 태종무열왕의 8대손. 9세 때부터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신재(神才)를 보여
목차
1. 신라 말 선사상의 수용과 종래의 연구
2. 낭혜의 사상과 성주산문의 개창과 활동
1)성주산문에 대한 연구
2)낭혜에 대한 연구
3)낭혜무염과 성주사 창건
4)낭혜무염의 선사상
5)성주산문의 경제적 기반
6)성주산문과 신라왕실과의 관계
7) 성주산문과 지방세력
8)성주사와 성주사의 문도
3.결론
본문내용
그런 면에서 불교신앙은 왕도 중심에서 지방사회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인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가 그 단초를 연 것으로 보이며 통일전쟁기라는 당시 정치 경제 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파가 신라통일기에 성립된 이후 불교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禪思想이다. 선사상은 신라하대에 수용되어 고려 초에 이르러 교단(종파)으로 정착되었는데, 중세불교를 더욱 발전시킨 선진적인 사유체계를 표방한 것이었다. 이로써 선사상과 이미 정착된 기존의 교종간에는 사상적으로 서로 대립하거나 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통합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려시기의 불교는 사상적으로 이러한 교와 선의 관계를 둘러싼 흐름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의 대중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불교대중화문제는 사회계층적인 측면과 지역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그 이면에는 일반 민들이 성장함으로써 그들이 요구하는 신앙적 욕구를 지배층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단계와 현실이 개재되어 있다. 또한 불교계의 전반적인 현황 즉 교학 체계의 양상, 신앙과 의식의 성격, 주도 승려 층의 정치 사회적 성향 등도 유기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참고 자료
조범환, 《신라선종연구》-낭혜무염과 선주산문을 중심으로-, 일조각, 2001
김두진, 〈사상계의 변동―불교의 변화〉,《한국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