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며
1. 동란국(東丹國)
2. 전기 부흥운동 - 후발해와 정안국
3. 후기 부흥운동 - 흥요국과 대발해국
나오며
본문내용
들어가며
‘고려태조는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발해유민을 이끌고 망명해오자 ‘왕’씨 성을 내 리고 후대하였다.’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려 로 망명해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중고등학교 교과서 속 발해 유민에 대한 내용은 위의 두 줄이 전부이다. 발해 유민이 고려로 망명해 와서 그들을 포용했다는 것. 망명하지 않은 발해 유민들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이에 우리는 발해 역시 멸망했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부흥운동을 전개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잊혀졌던 발해 유민들과 발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동란국(東丹國)
발해 유민들의 자발적인 부흥왕조에 앞서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忽汗城, 上京龍泉府)에 '동란국'(926∼82년)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거란정복자들이 발해 옛땅에 세운 괴뢰정권으로 다수의 발해인들이 참여하였으나 이를 발해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
거란이 동란국을 세운 목적은 발해의 마지막왕 대인선이 거란에 항복하여 발해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민이 계속 번영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거란의 통치하에 묶어두려는 즉, 발해지역의 거란화를 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동란국의 왕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큰 아들 야율배(耶律倍)였으며 기타의 고위직에 발해인들이 상당수 등용되었던 것은 발해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배려에 불과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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