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고전작가들의 생애와 작품개관의 특징 및 문학사적의의
- 최초 등록일
- 2005.01.09
- 최종 저작일
- 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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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박규수 [朴珪壽, 1807~1877]
이항로 (李恒老 , 1792~1868)
김홍집 [金弘集, 1842~1896]
기정진 [奇正鎭, 1798~1876]
이진상 [李震相, 1818~1886]
홍경래 [洪景來, ? ~ 1812]
강위 [姜瑋, 1820~1884]
최송설당(崔松雪堂)
본문내용
최송설당(1855~1939) 50여 편의 규방가사를 창작한 20세기의 가장 대표적 작가이다. 그녀는 1855년 8월 29일 지금의 김천에서 지남거사 최창환과 정씨 사이에서 세 자매의 장녀로 태어난다. 그녀의 가문은 고려조부터 평북 정주에 터를 내려 살아온 이름 있는 가문이다. 정4품 護軍 벼슬을 하던 증조부가 외가 유씨택이 홍경래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옥사하고, 조부는 정6품 司果 벼슬을 하였는데 전라도 고부로 귀양가서 1847년 8월 억울하게 죽는다. 점점 가세가 무너진 조부의 형제는 남으로 내려와 금릉(현 김천)에 자리를 잡으나, 아버지 형제 셋과 그 아들들이 연이어 죽는다. 송설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미 2,3세에 글자를 익히고 6,7세에 아버지로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워 글귀를 맞추어, 일찍부터 시인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는 또한 <구운몽><옥루몽><삼국지> 등 고대소설을 많이 준비하여 놓았다가 侍者들로 하여금 읽도록 하였다고 한다. 가사 작가로서의 그녀의 문예적 능력은 가학의 배경과 독서 취향 등으로 볼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송설당은 7세 때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엉ᄀ울한 가화를 설원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것을 듣고 아버지에게 가문의 부흥을 약손한다. 결국 그녀는 가문의 설원을 목적으로 혼인을 포기한다. 이후 재력을 모으는 데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17세 때는 아버지로 하여금 양자를 들이게 한다. 33세 되던 1887년 6월 19일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서울로 상경한다. 40세 되던 1894년 봄에 서울로 올라와 경운궁 근방인 무교동에 집을 정하고 불가에 귀의하여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할 길을 찾는다. 이때 선조 설원의 기도를 드리던 중, 절에서 嚴妃를 알게 되어 영친오아의 보모가 되어 궁중생활을 시작하낟. 이때 송설당이라는 당호를 고종황제로부터 받게 된다. 또한 집안에 아들이 없던 탓에 종제 광익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한다. 47세인 1901년 천은으로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위토까지 마련하여 향사의 일까지 준비한다. 그리고 花樹會를 열어 원근의 종친에게 전답과 학자금을 지원하는 등 가문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자임하낟.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절에도 시주를 많이 하여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다. 1914년 큰 흉년이 들었을 때는 재산을 희사하여 주민들을 구제하기도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