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해방 직후 북한의 근대적 개혁
- 최초 등록일
- 2005.01.22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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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글은 해방 직후부터 북한 정부수립 직전까지 북한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의 내용과 의의를 적은 글입니다.많은 도움이 되실거라 확신합니다!
목차
1.개혁의 주체 세력
1) 시대적 상황
2) 개혁기구의 설립과 참여세력
2. 개혁의 전개
1) 토지개혁
2) 주요 산업의 국유화
3) 노동법의 제정
4) 남녀평등법의 제정
3. 개혁의 성과와 의미
본문내용
북한의 개혁은 소련이 점령한 동구권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3단계에 걸친 소비에트화 작업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 제 1단계에 해당하는 순수 협력기는 45년 8월부터 46년 1월까지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연합시기로서 이때 북한의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조만식은 공산주의 세력과 손잡고 과도적 정부기구라 할 수 있는 5도 행정국을 창설하고 이끌었으나 얼마안가 5도 행정국은 폐지되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여타 좌익세력들을 포용하여 이끌어가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 때가 46년 2월이었으며 이 조직은 48년 1월 까지 만 2년 동안 존속하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많은 개혁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특히 토지개혁, 주요 산업 국유화, 남녀 평등법의 제정과 같은 사회주의적 개혁 등은 북한의 계획 경제적 토대를 확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2년간의 기간을 소비에트화의 제2단계인 통일전선 결성기라 한다. 제3단계는 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부터 9월의 정부 수립 전 까지 인데 이를 단일체제 수립기라하며 이 시기에 김일성은 군과 행정을 장악하게 된다.소비에트화의 제2단계인 통일전선 결성기에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으로 인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정치적으로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좌우익의 분열은 물론 좌익내부와 우익내부의 분열 그리고 중도파인 김구 김규식계열과의 마찰 등이 뒤섞여 근대국가로의 개혁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제도권에서 소외된 좌익세력은 48년 '2.7구국투쟁'을 일으켰고 제주도 ꡐ4.3항쟁ꡑ을 계기로 군에 침투하여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남로당에 의한 여순 반란사건 참가 군인들은 민간인 가담자와 함께 유격부대를 만들고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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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unikorea.go.kr. , 통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