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 모죽지랑가
- 최초 등록일
- 2005.02.04
- 최종 저작일
- 2003.11
- 1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모죽지랑가]에 대한 자세한 해석들이 행별로 들어 있습니다.
어학적, 문학적 쟁점을 모두 썼고요.^^
많은 참고자료 찾아서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배경설화
2. 해석 및 어학적 쟁점
3. 문학적 해석상의 쟁점
본문내용
1. 배경설화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만랑(당시의 화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 급간(신라 관등의 아홉째)이 있었다.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날마다 출근하더니 한 열흘 동안이나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니 대답하되 "당전(부대장급의 군 직책) 모량부 익성 아간(신라 제 6대 위의 관등)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직으로 가라 하여 급히 떠났기 때문에 낭에게 고하지 못하였노라." 하였다.
죽지랑이 이르되 "당신의 아들이 만이 사사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공사로 갔다하니 응당 가서 대접하리라."하고 설병 한 함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을 거느리고 가니 낭의 무리 백 삼십 칠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있느냐"고 물으니 "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죽지랑이 밭으로 찾아가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도록 하여 달라고 청했으나 익선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지금의 밀양군) 능절의 조(地代) 서른 석을 거두어서 성 안으로 싣고 가다가 죽지랑의 선비를 존대라는 풍도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막히고 변통이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서른 석을 익선에게 주고 요청하였지만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더니 또 진절 사지(신라 관등 13위)의 말 안장을 주니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화랑도를 관장하는 관직)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 그 더러운 때를 씻게 하려고 했더니 익선이 그것을 미리 알고 도망하여 숨어서 그의 맏아들이 대신 잡아갔다. 그 때는 한겨울의 몹시 추운 날로, 성 안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붙어 죽었다.
참고 자료
『논주향가』, 1976, 전규태,
『향가 해독법 연구』, 1980, 김완진,
『신라 향가의 연구』, 1993, 장진호,
『향가의 해석』, 2002, 신재홍,
『향가 문학』, 1964, 김준영,
『향가와 고려가요』, 김완진,
『고가연구』, 양주동, 1965
『한국고전시가작품론1』<모죽지랑가>의 시적문맥, 1995, 신동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