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충담사의 생애와 작품
2. 안민가의 출현배경
3. 안민가의 내용과 사상적 기반 분석
4. 안민가의 문학사적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三國史記』 卷第二에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題下에 신라 제 35대 景德王(742-765)에 관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歌僧 충담사의 두 편의 향가가 소개되었는데, 「安民歌」와 「讚耆婆郞歌」다. 본고는 향가 「안민가」를 대상으로 하여 논의를 전개하되, 경덕왕 치세의 여러 문제가 본가 이해에 주요한 단서가 된다고 보아, 가요 주변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가요 제작의 직접적 동기가 된 사건을 비교적 폭넓게 살펴보려고 한다.
「안민가」의 작가 충담사에 대하여 학계의 일부에서는 스님의 행적 시말이 실존인물과 여러 모로 다르기 때문에 설화상에서 형성된 작의적인 가공 인물로 보자는 견해와 왕에게 직접 충간하였던 이순으로 보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전자의 견해는 최철이, 후자의 견해는 김선기가 제기하였다. 최철은 「안민가」를 고래로 전승되어 내려왔던 치리의 노래로 규정하고 이어 가요 작품의 내용과 서사기술문이 작자의 이름과 서로 연관성을 띠고 있는 점을 보아 충담사는 일종의 설화상에서 형성된 작의적인 가공 인물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박노준은 『사기』에 등장하는 충신 이순이 실존했던 인물인 이상, 또 경덕왕이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정국을 정상궤도 위에 올려놓으려고 몸부림친 것이 사실인 이상, 안민가의 작자인 충담도 실존했던 인물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본고 역시 충담사를 실존했던 인물로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충담의 이름이 『삼국유사』의 편목 이름에 표훈대덕과 나란히 기재되어 있고, 둘째, 『삼국유사』의 「生義寺 石彌勒(생의사 석미륵)」조에도 '後名生義寺'의 주에 '지금 잘못 전해져 성의사라 한다. 충담사가 매년 3월 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공양한 것은 곧 이 부처다.'라 하여 충담의 이름이 등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민가」의 제작시기는 경덕왕 치세인 742년에서 765년 사이 24년 중의 어느 한 해의 3월 3일이다. 김선기는 원문 앞부분의 '王御國二十四年'을 곧 경덕왕의 歸正門 거둥의 해로 인정하였는데, '御國…年'은 그 용례들로 보아 왕의 治世年間 즉 在位期間을 말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귀정문 거둥의 年記라고 할 수 없다. 최철은 '王御國二十四年'을 경덕왕의 통치기간 24년을 의미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 뜻 속에는 통치한 기간중에서도 은연중 말년의 사실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 같은 표현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았다.
참고 자료
박노준, 『신라가요의 연구』, 二友印刷社, 1983.
박노준, 『향가여요의 정서와 변용』, 태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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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옥, 『신라시대의 연구』, 형설출판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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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 『향가의 문학적 연구』, 새문사, 1985.
최철·설성경, 『향가의 연구』, 정음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