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항일무장투쟁
- 최초 등록일
- 2005.05.05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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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남쪽의 주장
1) 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
2) 통일전선으로서의 임시정부
3) 해방 후의 임시정부
4) 과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해방운동의 배타적
정통성을 담지하고 있는가?
5)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는가?
3. 북한의 항일혁명전통론
1) 북한의 김일성에 대한 정통성 시비
2) 김일성 신화
3) 북한 정권의 탄생
4) 북한에서의 반종파투쟁과 혁명전통론의 대두
4. 나 오 며
- 남북의 정통성 경쟁 : 그 치열했던 소모전을 넘어서
본문내용
① 정부 자격으로서의 환국이 좌절
해방 이후 남측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의 반공노선이 적극화되면서 해방 후의 정치상황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에서 좌우대립 구도로 변화되었다.
②미군정과의 관계 악화
김구는 반탁운동을 만류하는 하지 앞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고, 이 사건을 겪고 난 뒤 하지가 반탁운동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정도였다. 이는 오히려 김구의 대중적 인기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반탁운동은 이승만과 같은 우익진영 쪽으로 경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탁운동의 선두주자 이승만은 일찍이 일제 시기에 미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해방 이후 반탁으로 선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의도는 임시정부처럼 민족자존의 입장에서 외세의 신탁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라기보다 소련을 배제하는데 있었다. 이처럼 임시정부가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외세의 차원에서 우익 진영에 가담함에 따라 임시정부 내의 좌익인사들은 1946년 초 임시정부에서 이탈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게 되었다. 탁치 등의 문제를 둘러싼 좌우대립은 임정만을 분화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결국 1946년 2월14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다음날인 2월25일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각각 발족함으로써 38선 이남의 정치구도는 좌우익 대립의 구도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재편에는 김구 등의 임시정부세력 자체의 입장도 한 몫 했다. 무엇보다 이들 스스로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던점은 다른 세력과의 합작에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③ 정치노선의 우경화
해방 후 임시정부세력의 여당이라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의 정책이 우경화되어 토지국유화 등 중요산업 국유화의 원칙이 후퇴했다는 것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또한 1946년 초반 김구, 신익희 등이 이북에 테러단 파견한 점이나 1945년 말 반탁운동 전개 이후 임시정부가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완화하고 이들을 싸고도는 듯한 인상을 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면면들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정치구도에서 남북 공히 실질적인 단선단정이 기정사실화되어가자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단정단선을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남이나 북 어디에서도 대표성을 인정받지 않게 된 임시정부 세력의 한계는 백범 김구가 암살되는 시점(49.6.26)을 고비로 명백해진다. 또한 그 무렵 이남에 닥친 반민특위 해산과 남로당 프락치 사건 등은 임시정부가 애초에 주장해왔던 반외세의 기치가 반공의 미명 아래 퇴색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