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세사] 명청 교체기의 조선
- 최초 등록일
- 2005.05.11
- 최종 저작일
- 2005.04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 머리말
*본문
1. 명청교체기 동북아 질서 변동
1) 16세기 후반 임진왜란과 조명관계
2) 외압’으로서의 ‘재조지은’과 조선 내정
3) 명청 교체기의 진전과 명의 조선인식
2. 명청교체기 조선 지배층의 대응
1) 현실적 ‘형세론’에 입각한 대응 - 선조와 광해군
2) 전통적 명분론에 입각한 대응 - 인조와 효종
3) 화이관과 북벌론
* 맺음말
본문내용
머리말
조선왕조에게 명(明)은 가장 중요한 외국이자 이웃이었다. 조선은 1392년 건국 이래 한족(漢族)왕조 명을 외교적으로 섬겨 왔으며 그를 통해 양국 사이에는 가장 전형적인 ‘조공(朝貢) -책봉(冊封)’ 관계가 유지되어 왔다. 명은 조선에 대해 정치, 문화적으로 ‘대국’으로 군림했으며 책봉이나 반조(頒詔)와 같은 조선 국왕에 대한 명의 외교적 승인이나 정책은 조선 국왕이 한반도를 지배하는 데 ‘정치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권위의 원천이기도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조짐이 가시화되면서 14세기 후반 이래 성립된 명 중심의 중화적 세계질서는 동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조공- 책봉’관계 아래서 명과 사대관계를 유지해 왔던 조선에게는 국제질서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자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조선은 명청교체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명은 임진왜란을 맞아 “조선을 구한다”는 표방아래 참전했거니와 그것은 위기에 처한 조선 지배층에 의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로 받아들여 졌다.
임진왜란 이후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建州女眞- 후일의 後金, 淸)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커짐에 따라 명청교체기의 흐름은 더욱 뚜렷해졌거니와 조선 지배층은 명이 중심이 되는 기존의 ‘중화적 세계질서’를 의연히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후금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부상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두 가지 입장을 놓고 빚어진 갈등이 이어지는 와중에 1623년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정치세력이 교체되었다. 정권 교체 직후인 1627년 정묘호란을 겪었던 조선은 1636년 다시 병자호란을 맞아 청에 굴복하게 되었다. 결국 명청교체의 흐름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기 까지 조선의 내정과 향후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명청교체기 동북아 질서의 변동 양상과 그에 대한 조선 지배층이 보였던 대응의 내용을 살펴보며, 구체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명의 조선 참전이 기존의 조명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 변화가 조선의 내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궁극에는 왜란이후 ‘명청교체’의 흐름이 더욱 현저했을 때 조선의 대외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