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임진왜란
- 최초 등록일
- 2005.05.18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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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왔습니다.
좋은 자료면 평가 꼭 부탁드립니다.
목차
1.머리말
2.임진왜란
1)임진왜란 이전의 조․일 관계
(1) 조선
(2) 일본
2) 임진왜란
(1) 임진초전(壬辰初戰)
(2) 임진왜란(壬辰倭亂) 의병(義兵)의 전과(戰果)
(3) 수군승리(水軍勝利)에 대한 이해(理解)
3) 명군의 임진왜란 참전목적과 강화목적
• 이여송군(李如松軍) 파병 이전의 강화 추진과 그 배경
(1) 조승훈(祖承訓)의 패전과 심유경의 등용
(2) 제 2차 파병 결정과 심유경 활용의 배경
① 명 본토 해방(海防)의 확보
② 출병 준비 과정의 애로
• 이여송군(李如松軍) 파병 이후의 강화 추진 배경
(1) 벽제 전투 패전과 강화논의
(2) 강화논의의 근원적 배경
① 명군 전력의 피폐
② 명의 어려운 재정 문제
③ 명의 한반도 전략
3.국제정세의 재확립
1) 중국에 대한 조선의 외교관계
2)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외교관계
3) 일본의 대외관계
(1) 에도막부(德川政權)의 정당성 확립
(2) 중화질서(中華秩序)로부터의 소외
(3) 일본형 화이의식(日本型 華夷義識)
4.맺음말
본문내용
2.임진왜란
1)임진왜란 이전의 조·일 관계
(1) 조선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일본 사신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온 것은 임진왜란 5년 전인 선조20년(1587)의 일로 그들이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사신으로부터 그들의 침략이 있으리라는 말을 들은 것은 사신으로 온 겐소(玄蘇:현소)에게서였다. 선조 21년(1588) 12월 대마도주는 중 겐소를 정사로, 아들 종의지를 부사, 유천 조신을 수행원으로 하여 일본의 국사라고 하고 부산에 들어 왔다.
왜사(倭使)는 다시 우리나라가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여전히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왜의 사신 겐소 등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1년이 넘도록 부산의 왜관에 머물면서 통신사를 보내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하고 기어기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고집하였다.
또한 우리나라가 요구한 것을 들어 줬기에 이에 우리의 조정에서도 더 거부할수 없는 입장에 있었고, 일본의 국내 사정에 어두웠던 조정의 일부에서는 왜인들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보아 이후에는 왜구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통신사의 파견이 결정되어서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 서장관(書狀官)허성 등의 일행이 선조 23년 4월에 왜국의 사신과 함께 부산을 떠나게 되었다.
일행은 대마도에서 1개월간 체류한 뒤 7월에서야 일본 경도(京都)에 이르렀으나 마침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지방원정 중이었으므로 그해 11월에 도요토미와 면접하고 귀로에 올라 그 다음해 정월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답서(答書)에는 불손한 글귀가 있었고, 또한 일본이 명나라에 들어간다는, 즉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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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임진왜란기 明․日의 협상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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