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세계 문화 유산, 수원화성
- 최초 등록일
- 2005.06.11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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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수원화성 답사에 앞서
2. 수원화성은?
1) 수원화성 축조의 역사적 배경
2) 수원화성의 의의
3. 수원화성 둘러보기
1) 화성행궁
2) 화령전
3) 수원화성
4. 수원화성 답사를 마치고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에서 20년(1794~ 1796) 사이에 축조되었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짓게 되었다. 따라서 정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영조에 대해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사도세자이고,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정조이다. 영조는 1724년에 즉위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심하던 때에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펼치면서(1727)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견고히 해나갔다. 그러다가 1749년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가자 대리정청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자를 불러 잦은 질책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세자는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되어 세자로서 금기되는 돌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1761년 세자가 영조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하며 영조의 ㅅ자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었고, 노론 세력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1762년, 영조 38년에 일어난 사도세자 사건이다.
참고 자료
- 수원시, (수원) 화성행궁, 2003, 수원시, 수원
- 김동욱,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2002, 돌베개, 서울
- 김동욱, 수원성, 1989, 대원사, 서울
- 반영환, 한국의 성곽, 1992, 대원사, 서울
- www.cosguide.com/culture/hwasung
- www.hs.suwon.ne.kr
- boinp.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