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허목과동사
- 최초 등록일
- 2005.06.15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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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시대 상황 및 허목의 정치적 배경
2.허목의 생애와 학풍
3.『동사(東事)』와 역사인식
4. 허목의 사학사적 위상
본문내용
조선 사회 17세기는 양란 후 와해된 사회질서를 재건하고 상처받은 자부심을 회복하여 도덕국가를 건설한다는 국가재건기였다. 그 기치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제압하고 중원의 주인이 된 여진족의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를 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과 전쟁으로 실추된 국가와 개인의 도덕심을 고양하기 위한 예치(禮治)로서, 대외 ․ 대내정책의 기본뱡향이 되었다. 인조 ․ 효종대인 17세기 전반 북벌론이 국가대의로서 기능할 때는 아직 중요 국가대사로서는 부각되지 않았던 국가의례 문제가 17세기 후반 현종 ․ 숙종대에 이르러 예치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정치문제화하게 되었다. 그것은 1659년 제1차 예송(禮訟 )인 기해(己亥)예송과 1674년 제2차 예송인 갑인(甲寅)예송으로 나타났다. 이는 17세기 붕당정치가 극성기에 이르러 벌인 이념투쟁으로서 서인이 신권강화의 노선을, 남인의 왕권강화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각기 상이한 학풍과 학파적 이론서에 두고 있었으니, 서인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원형으로 17세기 전반기에 나온 『가례집람(家禮輯覽)』등의 예서를 중요시하고 국가의례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내세우고 있음에 대하여, 남인은 고례(古禮, 『禮記』『周禮』『儀禮』)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차별성은 전자가 조선성리학을 신봉하고 있었음에 대하여 후자는 원시유학인 육경(六經)을 근거로 하는 고학풍(古學風)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학문적 차이가 예송에 반영된 것이다.양란 후 국가 비상시국을 당하여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이 정치일선에 대거 진출하여 국가의 기본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서인과 남인이 각기 상이한 학풍에 연유한 방법론을 제시하게 되니, 조선왕조의 학자관료인 사대부가 주역이 된 붕당정치는 그 정체성이 분명해지고 조선왕조의 특수성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었고 이시기에 남인정파의 대표적 인물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소북계(小北系)로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북인정권이 몰락한 후 남인에 편입된 근기 남인이었다. 송시열(宋詩烈)을 대표로 하는 서인이 7서(七書,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과『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체제 중심의 조선성리학을 시대사상화하는 데서 기본이념을 찾았다면, 허목은 고학인 육경학에서 준거틀을 찾으려는 원시유학에 대한 복고성을 보이고 있다
참고 자료
『한국 역사가와 역사학 上』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 엮음 (창작과비평사)
『동사』 허목 .저 김길환, 권영원 번역 (박영사)
『미수기언』 (민족문화추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