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반] 4.19와 6.3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06.18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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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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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4.19 민주화 혁명
1)원인과 배경
2)전개와 결과
3)4.19 혁명의 의의와 한계
2. 6.3운동
1)6.3 운동의 배경
2)6.3운동의 전개,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2)6.3 운동의 전개, 의의와 한계
1963년부터 전열을 정비한 학생운동은 1964년 3월 신학기의 시작과 더불어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 계기는 쿠데타 직후부터 박 정희 정권이 앞장서서 추진한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이었다. 1964년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의 절차를 걸쳐 한일국교 정상화를 서둘러 진행하려는 박 정권의 의도에 맞서 다수의 시민들과 학생들은 박 정권의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투쟁이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해 3월 24일 서울대학, 연세대학, 고려대학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발생하여 점차 확산 되었다. 이 시위는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 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저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요구가 단순한 정책상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박 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고, 박 정권 역시 궁색한 입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학생들과 어떤 타협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학생과 정부의 다소 우호적인 관계는 지속될 수 없었다. 다소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던 데모가 다시 고양된 것은 1964. 5.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를 계기로 해서였다. 학생들은 정부와 공화당이 주장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허구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단정하여 그것 집중적으로 폭로하면서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방도를 모색하였다. 또한 군사정권의 많은 의혹사건과 정책들에 약간의 회의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근대화정책의 전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다수의 학생들도 이 무렵 박 정권의 정당성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초기 한일회담반대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이 참여하고 교수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서울대를 비롯한 몇 대학 학생들의 단식 투쟁을 매개로 하여 6월 3일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6월 3,4일 양일동안 서울 거리는 4.19 데모에 버금갈 정도로 데모 인파로 붐볐다.
참고 자료
<한국사회 변동과 민중투쟁>, 정해구, 사계절, 1990
<현대 한국정치>, 손호철, (주)사회평론, 1997
<반제반일 민족주의와 6.3운동>, 이종오, 역사비평, 1988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