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조광조와 기묘사화의 사상적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5.08.10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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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말 열심히 작성한 논문식의 보고서 입니다. 직접 여러가지 참고서적을 읽어가며 작성한만큼 정성을 들였기때문에 양질의 보고서라고 자부합니다 많은 도움 되시길 바래요.. 각주도 달아서 교수님들이 좋아하실겁니다
목차
1.머리말
2.조광조의 출생에서 죽음까지
3.성리학의 보급과 정착과정
(1)조선 초기의 성리학
(2)조선 중기의 성리학
4.조광조의 사상과 기묘사화
(1)중종대의 시대적 상황
(2)조광조 사상의 특징
(3)개혁의 내용과 실제
(4)기묘사화의 발생
5.맺음말
본문내용
4. 조광조의 사상과 기묘사화
1)중종대의 시대적 상황
중종은 반정을 통해서 즉위한 국왕이었다. 그러므로 중종 초에는 실권은 아무래도 반정공신들에게 있었고, 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된 시기였다. 비록 중종이 왕이었다고는 하지만 왕으로서의 권위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또한 반정의 주역들이 실제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는 하였지만, 이런 권력을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왕조의 정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치적, 이념적인 기반이 너무나 취약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연산군대에 희생되었던 많은 유학자들을 복권시키고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중종 초반에는 역모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 정국은 더욱 불안하였다. 중종 초에 공신의 수가 너무 많다거나, 이들에 대한 포상이 지나치다는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실제 역모도 이와 관련이 많았다. 그러나 반정의 주역들은 이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중종 초 대신들의 정치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 8년 반정의 세 주역인 박원종, 유순, 성희안이 사망하저 중종은 친정하게 되었으나 이제까지 확고한 지지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중종은 이념적으로 당시의 정치 주역으로 떠오른 사림들을 사진의 지지세력으로 삼으려고 결정하였으며, 이로써 조광조가 정치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초기의 학문의 경향은 유학의 공리적인 요소에 주목하여 한당유학 혹은 선진유학으로 까지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해석이며, 실상 신유학도 그 자체가 이미 선진유학, 한당유학을 모태로 하여, 그것을 당시 사회상황과 관련해서 발전적으로 혁신한 것이었다. 조선초기의 학풍은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주자학은 물론, 기타 여러 학풍을 수용함으로써 주자학의 심도에 치중하였던 조선중기의 학풍과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참고 자료
각주를 달아 자세하게 나와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