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묘사화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5.08.12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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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관련 수업을 들을 때 중간고사 대체레포트로
작성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5권을 모두 읽고 책 본문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A+ 받은 레포트입니다.
구입하셔도 후회없으실거라 생각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비범한 성리학자
2. 기묘사화의 배경
① 현덕왕후 권씨 소릉 복위 문제
② 폐비 신씨, 폐위에서 복위까지
③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④ 사림파의 등용문, 현량과
⑤ 위훈 삭제
⑥ 주초위왕 ( 走肖爲王 )
3. 기묘사화의 발생
기묘사화에 대한 고찰
결론
참고자료 : 훈구파와 사림파
참고문헌
본문내용
성종은 훈구화되어가는 대신들을 억제하기 위해 사림세력을 진출시켰다. 그는 이들을 자기 세력의 기반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들 사림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지향하면서 훈구세력의 부패상을 공격해 나갔다.
이렇게 훈구와 사림이라는 두 세력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무오(1498년), 갑자(1504년) 두 차례에 걸쳐 사화를 일으켰다.
연산군의 횡포는 더욱 심해지고 백성은 곤궁 속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자신의 실정에 대한 올곧은 충고를 멀리하고,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회의 자오로 만들었다. 이에 그의 학정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한글투서도 잇달았다. 심지어는 “여자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당까지 손대려 한다.”라는 내용의 투서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연산군은 언문서적을 불태우고 한글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가운데 정치는 거의 방기되다시피 하였고, 연산군에 원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를 축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성희안, 박원종 등은 마침내 거사를 결심하고 당시에 인망이 있던 이조판서 유순정에게 그 뜻을 알렸다. 그러자 유순정이 이에 응하고, 때마침 왕이 장단 석벽에 행차하는 것을 기회로 그 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러나 왕의 행차가 중지되는 바람에 거사도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이 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학 있던 유빈, 이과 등의 거사격문이 서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제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신윤무를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는 무사를 모아 1506년(연산군12) 9월 1일 저녁 훈련원에 모였다.
이들은 먼저 임사홍, 신수근을 제거해야만 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면서 반정에서 추대될 진성대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누이와 딸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반정의 가담 여부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 박원종은 신수근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그를 찾아가 장기를 두자고 청했다. 그는 신수근이 연산군의 신하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반정에 가담할 것인가의 여부를 넌지시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장(將)’을 서로 바꿔놓아 보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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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성,2004,『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심산
박영규,1996,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들녘
이성무,2003,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이덕일,2002,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