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왕안석의 변법
- 최초 등록일
- 2005.09.27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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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혁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
Ⅱ. 왕안석의 정치 사상
1) 인성(人性)과 풍속(風俗)
2) 풍속(風俗)과 국정(國政)
3) 공리주의적 (功利主義的) 정책
4) 법(法)과 관료기구(官僚機構)
5) 관료의 임무
6) 국가재정(國家財政)
7) 농업 및 상업
Ⅲ. 왕안석의 변법
1) 균수법(均輸法)
2) 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
3) 청묘법(靑苗法)
4) 모역법(募役法)
5)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6) 시역법(市易法)
7) 장병법(將兵法)
8) 보갑법(保甲法)
9) 보마법(保馬法)
10) 군기감(軍器監)
11) 관료제도의 쇄신
Ⅳ. 개혁의 좌절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혁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
송태조 조광윤이 송을 건국한 때는 당나라가 망한 후 군벌들이 왕조를 세우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던, 이른바 5호 10국의 시대였다. 당 중엽에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 후 150년 간 실제로 정치를 담당한 세력은 무인 절도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광윤이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하여 절도사들의 발호가 쉽사리 수그러들리 만무했다. 이에 조광윤은 문치정책을 써서 무인에 대항하는 세력을 길러나갔다. 이 시기에 조광윤이 편 정책의 일단을 보여주는 말이 ‘병권석주배(兵權釋酒盃)’이다. 이것은 병권을 술잔에 녹인다는 것으로 절도사 무인들에게 매일 연회를 베풀고 술을 먹여서 군사를 동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10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틈을 노리고 중국 북방과 서방에 있는 이민족들이 세력을 키워 황하유역으로 진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고 있던 송에서도 건국 이래 100여년이 가까워지자 여러가지 폐해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초에 군주독재의 정치체제라는 골격은 만들어졌지만 구체적인 사회-경제정책은 당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보강한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체계적인 통치구조는 구성되지 아니한 상태였던 것이다. 국력이 상승하고 있을 때에는 그래도 좋지만 내리막길을 향하자 여러가지 면에서 모순이 노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서하와 7년간에 걸친 오랜 전쟁을 치르고도 승리하지 못했던 사실은 이후 커다란 문제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재정이 적자로 전락하여 해마다 그 양상이 심각해진 것이다. 적자가 된 최대원인은 서하와의 전쟁으로 인한 군사비 팽창이었다. 그 다음으로 재정 팽창에 영향을 미친 것은 관리 수효의 증가였다. 송조는 특정관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의 직무에도 복수의 관리를 배치했으며, 관청 내지 부서의 수효도 증가했으므로 관리의 숫자는 전대에 비해 현저히 늘어났다
참고 자료
권중달 옮김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힘) ‘자치통감’에 있다.” 푸른역사, 2002.
제임스 류 저, 이범학 역 “왕안석과 개혁정책” 지식산업사, 1991.
이근명 편역 “중국역사 下” 신서원, 1993.
이진복 외 1 옮김 “중국전사 下” 학민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