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옛노래문학, 시조]이현보
- 최초 등록일
- 2005.10.02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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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연과 속세 사이에서 갈등한 이현보`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이현보에 대한 소논문 형식의 글입니다!
그의 삶, 어부단가 작품 분석 등이 나와있습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이현보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3. 어부가의 연원
4. `어부단가`의 감상과 해석
5. 맺음말
본문내용
그가 35세 때 예문관 검열이 되어 기록에 소루함이 없도록 임금 앞에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계청을 하여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린 일이다. 갑자사화가 일어난 38세에는 이 사화와 관련된 치죄 논의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세자(世子)가 독서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을 논계(論啓)했다가 다시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결국 의금부(義禁府)의 추국(推鞫)을 당한 뒤 안동부(安東府)의 안기역(安奇驛)에 정역(定役)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행장에 의하면 이현보는 연산조에 사관(史官) 재직 시 조정이 혼탁하고 정사가 혼란한데도 직필(直筆)을 서슴지 않아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다고 한다. 중종반정으로 방면되었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이후 그의 정치 행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두 차례의 사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 자신이 겪은 시련뿐만 아니라, 스승 홍귀달의 사사(賜死), 혁신적인 사림세력들의 무참한 죽음과 정치적 좌절을 지켜 본 그로서는 중앙 관료세계에 대해 상당한 혐오를 느낀 듯하다. 절실한 필설(筆舌)로 사관(史官)과 간관(諫官)의 직책을 수행하려 하였으나 부도덕한 왕권과 사화로 인하여 경색된 정국에서 오히려 커다란 좌절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반정 이후 비공신계 훈구 주도의 보수주의 정국에서도 강경한 언론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는 곧 외직(外職)을 자청하고 귀거래(歸去來)의 뜻을 품게 된다. 이후 그의 환력(宦歷)을 살펴보면 42세에 영천군수에 제수된 이래, 가끔 중앙관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수령이나 관찰사 등을 오랜 기간 역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중앙관직이나마 권력구조의 핵심부와는 거리가 있는 한직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러한 정치적 입지는 16세기 전반의 변혁적인 역사 무대에서, 또한 이후 사림파의 계보적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역기능을 초래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정치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도전적 열정이 사라진 이후 이현보의 관직생활은 비교적 평탄하였으며 시선을 돌려 향촌사회 개혁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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