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도산안창호
- 최초 등록일
- 2005.10.03
- 최종 저작일
- 2005.10
- 1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500원
소개글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에서 안흥국이라는 평민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까지의 아이 적에는 집에서 글을 배웠고, 아홉 살에서 열세 살까지는 여느 집 아이처럼 소먹이는 일 등의 집안일을 거들면서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런대로 공부다운 공부를 한 것은 열네 살에서 열여섯 살까지의 3년 동안으로 김현진이라는 이웃 마을의 선비에게서 였는데, 물론 당시의 전통적인 학문인 유학이 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생애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여섯 살 나던 1894년 평양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목격한 일이다. 이 때 그는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전쟁과 무관한 엉뚱한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통해 그때까지의 평범한 생활을 깊이 반성하여 앞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목차
Ⅰ. 序論
Ⅱ. 島山 安昌浩의 生涯와 業績
1. 出生과 成長
2. 獨立協會 活動
3. 新民會에서의 活動
4. 興士團 活動
5. 上海 臨時政府 活動
6. 韓國 獨立黨 活動과 安昌浩의 殉國
Ⅲ. 島山 安昌浩의 思想(民族主義思想)
1. 힘의 思想
2. 民族改造思想
Ⅳ. 結論
본문내용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民族運動)의 큰 지도자(指導者)이며 또 뛰어난 민족주의 사상가(思想家)였다. 그는 우리 겨레가 일제(日帝)의 침략과 지배아래 고통받고 있을 때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 또 독립을 되찾기 위한 구국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섰다.
그는 한말에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담해 활동했고, 미국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해 지도했으며,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지휘했다. 합병을 눈앞에 두고 망명(亡命)을 떠난 그는 1910년대에는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이끌었고 흥사단을 조직했다. 이어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에 건너간 그는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만들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그는 불행히도 이듬해 일제 경찰에 체포당해 국내에 끌려오게 되었다.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그는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도산은 쉴 새 없는 구국독립의 실천 활동 속에서도, 한편으로 우리겨레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며, 더 나아가 살기 좋은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영원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깊이 연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게 되었다.
먼저 그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절한 기회에 그들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 데 있다고 보아 최소한의 근대적 무력을 준비해 두자는 독립전쟁 준비론을 정립했다. 동시에 그는 독립을 이룬 다음에는 모든 국민들이 자유롭고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참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주국가 건설론을 갖고 있었다. 또 독립을 이루고 민주국가를 세워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을 위해 헌신할 지도적 인물들의 양성이 중요하다고 본 그는 민족운동 간부의 양성을 위한 흥사단운동론도 폈다.
참고 자료
김병욱, 『島山 安昌浩의 政治思想에 관한 硏究』, 중앙대학교 대학원: 정치학정공, 1986.
이종연, 『島山 安昌浩의 思想과 敎育活動』,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1985.
박경희, 『島山 安昌浩 硏究』,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