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후기의 붕당정치에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 그중에서도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을 통해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 대해서 깊이 고찰한 내용입니다. 여러논문들을 참고하여 깊이가 조금 있는 글이니 이점 유의하시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도움 되시길..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붕당정치의 전개
Ⅲ. 서인분열에 관한 여러 의견
Ⅳ. 노론과 소론의 대립
1). 송시열과 윤증
2). 회니시비
Ⅴ. 나오며
본문내용
또 다른 회니시비 논쟁은 송시열의 윤선거 묘문저술과 윤증의 배사론 명분이라 할 수 있다. 송시열은 윤선거 생전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강화도사건과 윤휴의 사정시비를 벌였으나 서로 의절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송시열은 1669년 윤선거의 상을 당하여 평생 交友之義로 祭文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그 제문에서 `천지가 어두운데 한 별이 밝았도다`하고, 또한 `깨끗하고 때묻지 않았다` 등과 같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윤증은 박세채가 작성과 행장과 자신이 만든 연보(年譜)를 가지고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여기서 송시열은 아주 거절하지도 않고 윤선거 부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성실하지 못한 묘명을 지어 보냈다. 바로 이것이 커다란 화근을 만들었다. 송시열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짓지 않고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따라 생전의 행적과 관직을 기술한 후, 박세채가 극진한 행장을 지었기에 나는 옮기기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 (述而不作)라고 덧붙여서 비문을 끝맺었다. 박세채가 윤선거의 생애를 극찬했으므로 자신은 새로 짓지 않고 박세채의 행장에 따라 옮기기만 했다는 조롱이다. 이는 윤선거의 생애에 관한 모독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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