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인간 김형남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5.10.22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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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숭실대학교에 재학하는 학생으로써...
형남공학관의 형남...
김형남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과 자신의 견해를 담은 내용입니다.
이 레포트로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목차
1. 김형남의 출생과 성장
2. 미국유학과 일신방직
3. 산업선교의 효시 공장교회를 세우다.
4. 숭실대학 재건
5. 이사장 취임 및 총장 취임
6. 기독교박물관의 설립
7. 임종
8. 생각 및 견해
본문내용
1. 김형남의 출생과 성장
대한제국의 국세가 기울어 이 땅이 강제로 일본에게 병합이 되던 1905년 1월 18일 평남 강서군(江西郡) 동진면 태성리(台城里)에서 광주 김씨인 아버지 김찬희(金燦禧)와 어머니 이진희(李鎭禧)씨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한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그 가족사적인 배경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인격 형성은 3개의 기둥이 떠받히고 있었다고 할 수 는데, 그 하나는 그의 부친 김찬희의 근면과 성실의 교훈이요, 둘째로 그의 어머니 이진희의 기독교적인 신앙의 유산이요, 셋째로는 그가 태어난 강서군은 신교육과 민족운동의 거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애족활동과 신교육운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안교육이 자식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예나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의 근면성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훈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성실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그의 부친의 엄격한 교훈으로 체질화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린 형남이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 논으로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새참을 먹은 후에 빈그릇을 대강 설거지하고 나서 음식 찌꺼기를 무심코 논두렁에 내버렸는데,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왜 거기다 버리느냐? 논바닥에 버리면 거름이 될 것을...”했다고 합니다. 사소한 거 하나도 그냥 버리지 않는 부친의 깨우침은 근면과 절약의 정신을 이루었고 그 후 숭실학교의 기계창에서 배우고 익혔던 자조정신과 함께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뿌리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3.1운동과 105인 사건의 중요인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형남의 가슴에도 새 물결에 대한 동경과 애국애족심을 키워나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무릎에서 성경을 배워온 형남은 일곱살 되던 해에 북 장로교 선교사인 마포삼열(Samuel Moffett)목사가 대성리에 설립한 명신학교(命新學校)에 입학함으로서 기독교적인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머리가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20년에 숭실중학교 2학년에 입학, 1922년에 졸업하고 곧 숭실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