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민족대표로서 활동하던 최린. 그가 무슨 이유로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을까!?
그의 생애와 그의 친일사항을 낯낯이 밝혔다.
목차
1.서론
2.본론
-최린의 생애
-민족대표 33인으로서 활동
-친일보다 더 미운 변절의 역사
-최린에 대한 평가
-여러 관점에서 바라본 최린
3.결론
본문내용
2. 민족대표33인으로서 활동
최린,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이다. 온몸으로 독립을 부르짖던 그가, 민족대표로 활동하던 그거 왜 친일의 손을 들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전 그가 민족대표로서 활동하고, 3.1운동이 일어났던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결과, 의의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민족대표 최린. 과연 그를 민족대표라 칭할 수 있는가?!
박준승, 박희도, 백용성, 손병희,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양한묵, 오세창, 오화영,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일, 이종호, 이필주, 임예환, 정춘수, 최린 , 최성모, 한용운, 홍기조, 홍병기를 말하며 대부분 종교계 인사로서, 천도교는 손병희 등 15명, 기독교는 이승훈 등 16명, 불교계는 한용운, 백용성이 참가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민족 대표??라고 부르며 당시 운동의 지도자로서 높이 추켜세우고 예우해왔다. 말 그대로 민족을 대표할만한, 이끌어 갈만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 그들은 과연 민족대표로서의 자격이 있었던 것일까?! 3월 1일 거사 당일 `민족대표 33인`(참석자는 29인)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였던 파고다 공원에는 가지 않고 종로에 있던 `태화관`에 모였다. 학생 대표가 찾아와 만세시위를 직접 주도할 것을 청하였으나, 우발적인 폭력시위로의 변화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거절하였다. 이어 만세삼창과 건배를 한 뒤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을 선언한 사실을 고하고 자수하였다.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은 지주, 자본가로서의 사회경제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만세운동을 전체적으로 지도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또한 그 내용보다는 `독립을 선언`했다는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선민족의 힘을 결집시켜 독립을 쟁취하기 보다는 열강의 `자비심`과 일본의 `이성`에 호소하여 독립을 청원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들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은 3.1운동의 개시 및 초기 운동의 확산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그 의의를 다하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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