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상, 철학사]고운 최치원의 사상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5.11.05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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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치원(857 ~ ?)은 신라말기부터 후삼국시기에 거쳐 파란 속에 생애를 보낸 인물인 동시에 신라하대를 대표할 만한 도당유학생 출신의 대 유학자요, 유교주의적 이상정치를 추구했던 정치가였다. 최치원은 귀국 후 벼슬살이한 10여 년의 기간에 신라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너무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 세계를 비판하며 재야로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최치원은 죽는 날까지 유교정신에 입각하여 신라 왕조의 호국정신을 지닌 지조 있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최치원의 생애와 역사관, 종교관, 유교적 개혁사상을 통해 그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목차
Ⅰ. 고운 최치원 선생 연보
Ⅱ. 역사관
Ⅲ. 종교관
(1) 유학자 최치원
(2) 불교관
(3) 도교관
(4) 삼교혼융의 종교관
Ⅳ. 유교적 개혁사상
Ⅴ. 민족적 자각으로서의 동인의식(東人意識)
본문내용
‘동인의식’은 최치원의 민족 주체성에 관련된 의식세계를 한 마디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최치원의 사상에 있어서 중핵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그의 철학사상의 전체적인 구조와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동인의식은 단적으로 말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 , 사상적 밑뿌리를 캐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이른바 ‘현묘한 풍류도’를 지닌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긍지가 동인의식으로 표출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도당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한 뒤 그에게 있어서는 거의 모든면(특히 사상 , 종교면)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러한 데에서 그의 사상적 통일성과 핵심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지식층에서 사대모화적 성향이 거의 일반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문화민족이고 나아가 세계문화의 밑바탕이 된다고 외쳤던 것은, 후일 고려 , 조선 시대로 내려오면서 민족 주체의식의 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사대 , 모화의식이 하나의 시대사조로 굳어질 때에도, 민족의 자존심과 우월감을 드러내는 데 밑바탕이 되어 연면히 이어지게 되었다.
고운 최치원은 전화기적 난세를 살았던 학자요 사상가였다. 그는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면으로 힘썼다.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유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 및 도선 사상을 섭렵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사상을 종횡무진으로 한 몸에 체득하였다. 그는 당세와 관련하여 유교는 경세의 측면에서, 불교는 개혁과 호국의 측면에서, 도선사상은 제세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려 하였다. 또한 그의 동인의식은 민족의식의 자각을 널리 고취시켰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최치원이 강조, 추구하였던 ‘인간주체’의 문제와 철학 , 사상 , 종교의 보편성 및 독자성의 문제는 천여 년이 흐른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히 추구해야 할 하나의 화두로 남아있다. 쟁(爭)의 논리가 아닌 화(和)에 기반을 둔 최치원의 상호 일체적이고 보완적인 삼교관과 인간주체적 성격은 다문화 , 이질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각 종교간, 민족간의 대화를 통한 교섭과 융합, 그리고 ‘공동체의식’의 고취를 제시하고 있으며, 한민족의 화합과 동질성 회복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최치원의 철학사상이 지닌 현대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최영성,『최치원의 철학사상』, 아세아문화사, 2001
한국사학회 ,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편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주류성, 200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