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뉴턴의 삶과 과학상의 업적, 논쟁
- 최초 등록일
- 2005.11.06
- 최종 저작일
- 2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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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뉴턴의 생애와 업적, 뉴턴이 살았던 시대는 어떠한가
뉴턴과학의 수용과 주요 논쟁들에 대해서 정리하였습니다.
목차
1. 뉴턴의 생애
2. 과학상의 업적
(1) 광학
(2) 수학
(3) 역학
(4) 뉴턴의 제 1법칙과 제3법칙
4. 뉴턴의 시대
5. 뉴턴과학의 수용과 주요 논쟁들
본문내용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스소프에서 태어나 그랜섬의 킹스스쿨에서 공부하고, 1661년 6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65년 학사학위를, 68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케임브리지시절의 뉴턴은 염세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해외무역과 상업이 성해지고 대학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구태의연한 연공서열적인 학내 인사가 횡행하고 퇴폐적 생활에 빠진 교사와 학생이 적지 않아, 대학에 대한 청교도적인 반항과도 같았다. 69년 스승인 I. 배로의 루카스교수직을 이어받아 수학을 강의했다.
68년, 71년에 반사망원경을 제작했으며, 72년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86년 국왕이 대학의 규정을 침해하고 베네딕트파의 신부 프란시스에게 학위를 주어 케임브리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하자, 이것에 저항하는 대학 전권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 결국 국왕을 패배시켰다.
88년 프란시스 사건에서의 굳은 자세를 인정받아 대학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간 런던에 체재했다. 이 때 J. 로크와 S. 페피스, 정부고관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행정직을 구하려 했지만, 토리당의 시대였기 때문에 휘그당이었던 뉴턴에게는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93년 《프린키피아》의 출판(1687) 후의 허탈감과 반삼위일체설의 논문 집필(1690)의 긴장 등으로 뉴턴은 우울상태에 빠졌다.
96년 친구인 C. 몬터규의 도움으로 조폐국감사로 취임, 99년 조폐국장이 되었다. 위조화폐를 단속하며 핼리, 로크와 함께 몬터규의 화폐 재주조사업을 도왔다. 1700년에는 화폐 중량의 엄격한 정확성을 구하여 17년에 정부에 건의 1기니 금화가 은 21실링으로 결정됨으로서 영국은 실질적으로 금본위제로 되었다.
그러므로 뉴턴은 영국화폐제도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1701년 10월 루카스교수직, 트리니티 칼리지의 이사직을 사임했다. 같은 해 케임브리지대학 선출 국회의원, 1703년 왕립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705년 작위를 받고, 10년 그리니치천문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27년 런던교외의 켄싱턴에서 죽었다.
참고 자료
- 뉴턴 Johannes Wickert 한길사 1998
- 뉴턴: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지는가 Jean-Pierre Maury 시공사 1996
- 뉴턴은 어쩌다 미쳐버렸나 James Leavesley 가람기획 2001
- 뉴턴의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까지 方勵之 전파과학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