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문]조선의 후궁 제도
- 최초 등록일
- 2005.11.09
- 최종 저작일
- 1997.01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소개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역사에 관한 레포트로 조선시대의 후궁들에 대한
삶에 대해서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많은 이용 부탁 드립니다.
목차
1. 후궁제도의 작위
2. 출신에 따른 후궁의 분류
1) 정식후궁
2) 궁관 출신의 후궁
3) 노비, 기생 출신의 후궁
3. 후궁의 삶과 죽음
4. 조선시대 여인들과 권력
1) 장희빈
2) 장록수
3) 폐비 윤씨
5. 중국의 후궁
본문내용
조선왕조에서 왕이 후궁을 맞아들이는 제도는 태조와 정종 대에는 없었고, 태종 대에 와서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엔 중국의 ‘일취구녀제(一娶九女制)’에 준하여 1왕비, 3세부, 5처제를 택했다. 그리고 세부를 ‘빈’이라 칭하고, 처를 ‘잉(媵)’이라 칭하여 ‘3빈 5잉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일취구녀제는 황제에 준한 제도이므로 태종은 조선이 중국의 신하국이라 하며 중국 제후의 신분에 맞는 처첩제도로 바꾸었다. 이것이 ‘제후부인삼궁(諸侯婦人三宮)’의 관례에 따라 마련한 ‘1빈 2잉 제도’이다. 하지만 태종은 물론이고 조선의 어느 왕도 이 원칙을 지킨 경우는 없었다. 태종은 황실을 의식하여 법적으로는 ‘1빈 2잉’을 제도화했지만, 스스로 이 법을 무너뜨렸다.
후궁은 왕비 이외에 임금이 거느린 처첩을 통칭한 것으로, 대개 종4품에서 정1품의 작위를 받은 내명부들이다. 이들 벼슬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종4품 소원, 종3품 소용, 종2품 숙의, 정2품 소의, 종1품 귀인, 정1품 빈 등이다(세자도 후궁을 둘 수 있었는데, 세자의 후궁에게는 종5품에서 종2품까지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 초에는 이런 칭호가 확정되지 않아 후궁을 대개 빈(嬪), 비(妃), 궁주(宮主), 옹주(翁主) 등으로 불렀다.
태조 대의 후궁 칭호를 보면 성비, 정경궁주, 화의옹주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숙원, 숙의 등의 구체적인 작호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정경궁주가 원래 옹주였다가 궁주로 승격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궁주가 옹주보다는 한 단계 위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성비는 원래 빈이었다가 후에 비로 승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태조 대의 후궁은 옹주, 궁주, 빈, 비의 단계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종 후궁들의 칭호를 보면 빈이 1명, 숙의가 5명, 궁주가 1명 보인다. 나머지 2명에게는 칭호가 주어지지 않았다. 정종 대에는 숙의라는 작호가 처음으로 등장했지만, 아직까지는 체계적이지 못해서 여전히 궁주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