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대만과 중국의 관계
- 최초 등록일
- 2005.11.26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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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면서,
[2] 대만(Taiwan)
[3] 대만과 중국의 관계
1> 대만과 중국의 분열 원인과 주요 변화
2> 시대적 양안관계의 변화
1. 무력대치와 충돌시기(1949~1978)
2. 정치냉전과 외교대치시기(1978~1987)
3. 민간교류와 협상시기(1987~현재)
3> 주요 변화 일지
4> 양안간의 경제, 무역 관계
5> 양안의 군사력 비교
[4] 최근의 관계 변화(21C) – 일지.
[5] 의미 및 영향
[6] 추후 전망
[7] 마치며…(대만과 중국간의 관계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본문내용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간의 체제경쟁은 1911년 청조를 붕괴시킨 신해혁명 계승자로서의 중화민국(1911-49년간 중국대륙의 일부를 통치, 1949년 이후대만으로이전)/국민당과1949년 중국대륙을 통일한 중화인민공화국/공산당간의 체제 정통성 문제 및 정치, 경제, 외교, 이념, 군사를 포함하는 전 분야에 걸친 대립이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의 창당 이후 양측은 1924년 1월 군벌을 토벌하기 위한 제1차 국공합작,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점령 및 1937년 7월 일본군의 중국대륙 전면 침공에 대처하기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대륙 각지에서 양측간 교전이 발생하였고, 특히 1946년 7월부터는 전면적 내전에 돌입하였다.
중국에서는 1945년 8월부터 1949년 9월까지 국민당과의 내전기간을 "해방전 시기"로 분류하는데, 일본의 항복 당시 공산당원 수는 120만명, "홍군"(공산당군)의 수는 90만명 이상이었고, 1947년 말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국민당군은 약 270만, 공산당군은 120만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승세를 굳히고 있던 공산당군의 수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동 기간 전투중 가장 치열한 격전은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전개된 沈陽, 淮海, 北平(北京)-天津戰鬪로서, 특히 회해전투는 3개 전투중 유일하게 국민당군의 수(약 80만)가 공산당군의 수(약 60만) 보다 우세하였으나 약 5개월에 걸친 교전 끝에 약 15만의 국민당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내전 기간중 양측 및 민간인 사망자는 수백만이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및 국민당의 대만으로의 정부 천도 이후에도 양측은 각각 무력으로 "대만해방" 및 "본토수복"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는데,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한 미 7함대의 대만해협에 대한 개입•봉쇄로 인해 대규모 공격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1954-55년, 1958년 8월 金門島, 馬祖島에 대한 포격, 그리고 대만은 1960년대까지 중국본토 인근 성에 대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는데, 양측간의 교전이 아닌 일방적인 교전의지 과시, 혹은 특수임무의 수행이 주목적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