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레포트
목차
Ⅰ. 머리말 - 광개토대왕비의 역사적 의의
Ⅱ.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Ⅲ. 광개토대왕비는 언제 발견되었는가
1) 능비의 현상
2) 능비의 재발견
3) 비문의 탁본과 조사
Ⅳ. 광개토대왕비문은 왜 변조되었는가
Ⅴ. 광개토대왕비문의 진상은 무엇인가
-신묘년기사의 변상과 진상-
1) 사까와 쌍구가묵본(酒勾雙鉤加墨本)
2)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
3) 석회칠이 된 1918년경의 능비 모습
4) 석회가공탁본
5) 석회가공탁본의 “왜만왜궤` ; 원석탁본상의 “왜구대궤”
6) 최근의 대표적 탁본
7) 신묘년기사의 진상
Ⅵ. 광개토경은 어디인가
1) 북방경략의 웅지
2) 남진정복의 성격- 국부민은과 통일의지의 구현
Ⅶ. 맺는말- 능비의 연구과제와 광개토경의 역 사적 의미
<참고문헌>
본문내용
高句麗의 정복국가로서의 성장과정 중에서 廣開土大王代는 高句麗史를 구획하는 영광의 시대라 할 것이며, 民族史에 있어서는 격동하는 東亞의 정세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民族意識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統一秩序의 구축에 부심하던 전환기라 할 것이다. 따라서, 高句麗史 연구에 있어서나 三國을 중심으로 한 東亞의 交涉史硏究에 있어 이 시기가 갖는 歷史的 意味가 보다 부각되어야 할 것이며, 大王의 훈적을 전하는 廣開土大王碑도 자연 이러한 시각에서 보다 면밀히 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陵碑가 再發見된 이후 그 연구는 高句麗史를 비롯한 韓國古代史의 발전과정을 해명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陵碑는 參謨本部를 비롯한 日本帝國主義官學에 의해 `任那日本府`라는 허구를 토대로 한 古代 日本의 韓半島 進出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서 變造・提示되었던 까닭에, 이후 근 1세기동안 陵碑硏究는 高句麗史를 해명하였다기 보다는 古代 韓日關係의 주도권 논쟁을 둘러 싼 공방으로 韓日學界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陵碑의 變造와 歪曲은 최근 日本의 歷史敎科書 문제나 망언등에서 보는 것처럼 日本人의 植民地史觀에 입각한 韓國史 歪曲의 출발점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최근 침묵을 지키고 있던 中國學界에서도 현지조사의 이점을 토대로 한 새로운 연구를 내는 동시에 韓日學界에 高句麗 遺蹟을 개방함으로써 陵碑에 대한 현지조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韓・中・日 삼국학계의 관심이 새로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 陵碑의 연구는 이와같이 高句麗史를 비롯한 韓國古代史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近代 日本의 韓國史 歪曲에 대한 체질비판에 연결되며, 나아가 東亞交涉史의 문제로 확대된다.
廣開土大王은 이미 1,600년전의 인물로 우리와는 시공을 달리하는 역사적 존재이지만, 이러한 점에 있어 오히려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는 현재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廣開土大王碑文의 올바른 해석과 연구는 곧 왜곡된 韓國史의 再構를 의미할 뿐만아니라 東亞交涉史의 정당한 이해에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廣開土大王은 누구인가에 대해 먼저 알아본 후, 廣開土大王碑文과 최근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비문변조와 변조설의 진상에 대해 알아보자.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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