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5.11.27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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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세기에 이르면서 유럽의 민족주의 열병은 전유럽국가의 핵심이 되어 다른 민족국가를 이웃으로 보지 않고 경쟁자나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럽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고 두 힘이 서로 부디치면서 유럽 전체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각 나라는 자기들의 세력을 넓히고 크게 확장해 나갈 욕심만 가득했습니다.
유럽은 독일과 영국을 주축으로 3국동맹과 3국협상을 맺는 등 동맹국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살해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 되었습니다. 사실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싸움이었으나, 오스트리아에서 동맹국인 독일에게 전쟁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기다리던 독일은 서둘러 전쟁을 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각국으로 번져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도와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고, 프랑스는 러시아를 지원하며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여 유럽전체가 선전포고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양문명은 점차 비극으로 빠져들어 갔던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그 과정, 의의를 이 레포트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목차
1. 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주변환경
1) 국제적 긴장 격화
2) 1차대전의 발발
2. 1차 세계대전시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 계획
1) 독일 슐리펜 계획
2) 프 랑 스 17계획
3) 프 랑 스 의 The Invasion of Lorraine, 1914
3. 참호전 (노일전쟁, Verdan 전투, 연합군의 Somme공세)
4. 파리평화회의
5. 1차 세계대전의 의의
본문내용
유럽의 국제적인 긴장을 격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비스마르크 실각후의 독일의 적극적인 세계정책의 추진과 이를 위한 군비확장이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시대에 있어서도 열강의 뒤를 따라 아프리카와 남태평양 그리고 중국 등으로 진출하였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열강의 세계분할에 한 몫 보자는 것이지 열강의 어느 특정 세력권이나 이권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1900년경 열강의 세계분할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까지 독일은 계속 강력하게 세계정책을 추구하고 기존 세력권이나 이권을 무시하면서 파고들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은 세계분할이 거의 끝날 무렵 터키 경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직접 그곳을 방문하는 등(1898)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Byzantium과 Bagdad간의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이를 Berlin과 연결하는, 이른 바 3B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세계정책의 기본방향은 영국의 Cape식민지와 Cairo, 그리고 인도의 Calcutta를 연결하는 3C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터키 및 지중해로의 진출정책과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국제적 불안을 세계대전으로까지 몰고 간 중요한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고, 장기간에 걸쳐 대립을 거듭해 오던 영국과 러시아가 서둘러 타협을 모색하고 협상을 맺은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참고 자료
<참호에서 보낸 1460일> 존 엘리스 지음 마티 펴냄 2005년 11월 10일
20세기 세계 역사 (대변혁의 시대) 비토리오 주디치 지음 사계절출판사 펴냄 2005년 10월 07일
<전쟁의 세계사> 윌리엄 맥닐, 이내주 지음 이산 펴냄 2005년 09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