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프랑스의 영화산업
- 최초 등록일
- 2005.12.01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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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 영화의 공식적인 생일은 1895년 12월 28일인데 이날은 뤼미에르(Lumier)형제가 파리 시민들에게 그들의 신안특허인 씨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로 만든 영화를 상영한 날이다. 그들 촬영팀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본 것을 카메라를 이용하여 기록해 둔 다음 그것으로 최초의 뉴스릴을 만들어냈다. 뤼미에르 형제에게 있어서 씨네마토그라프는 단순히 과학적인 호기심의 상대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 형제가 잠재적인 예술성이나 상업성으로 이용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의 큰 도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전환은 기대하지 않았다.
목차
1.프랑스 영화사업의 개요
2,무성영화의 탄생
3.1920년대 시각주의와 전위영화
4,1930년대의 토기영화
5,전후 암흑영화
6,누벨바그(Nouvelle Vague)와 그 후의 경향
본문내용
1957∼58년 무렵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영화의 흐름을 이루는 것은 누벨바그, 즉 새로운 물결이다. 54년 1월 바쟁이 주재하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표된 트뤼포의 논문에 따르면 카르네와 플레베르에 의해 재현되었던 `시적 리얼리즘`이 전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강조점이 옮겨졌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카메라가 비추는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담으며, 종래 허구적이고 과장된 형식을 탈피하여 생생한 영상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악, 위선, 모순 등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시네마 베리테`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것이 누벨바그의 기본태도였다. 전통을 거부하며,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논리나 질서가 부재하는 세계에서의 존재를 그리며, 형식면에서는 이야기 구조의 느슨함과 개방성을 추구하여 영화제작에 혁신을 가져온 누벨바그는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은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시네마테그 프랑세즈(영화자료관)` 등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종래 영화작법을 타파한 참신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 트뤼포의 <어른은 몰라(1959)>, 샤브롤의 <사촌들(1958)> 등은 누벨바그의 선구적 작품으로 손꼽 다. 누벨바그의 실험적 확장을 잘 구현한 사람은 고다르로, `시네마 베리테`의 현실성이 허구적인 요소들과 혼합되는 새로운 종류의 리얼리즘을 표현, <미치광이 피에로(1965)> <막아에 대한 동정(1968)> <음유시(1969)> 등을 계속 발표하면서 몽타주에 의한 심리주의를 배격하고 정치적인 제재를 즐겨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0년대의 영환 <인생(1980). <열정(1982)> 등에서는 정치적 색채는 퇴색하고 60년대의 영화로 되돌아간 듯 미학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뤼포는 시나리오를 스스로 제작하거나 공동작업하녀 <갑자기 불꽃처럼(1961)>과 <쥘과 짐(1961)> 등에서는 낭만적 리얼리즘을 드러내었고, <아메리카의 밤(1973)>에서는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예술관을 확고히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