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배]전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 최초 등록일
- 2005.12.14
- 최종 저작일
- 2005.12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전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한 자료입니다^^
일본의 야욕이 담긴 신사참배문제....이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야스쿠니의 이중성
1.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내외 의식의 차이
2.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3. 미키 총리
4. 후쿠다 총리
5. 스즈키 총리
6. 나카소네 총리
7. 고이즈미 총리
Ⅲ. 패전 책임과 역사 인식 문제
1. 천황제와 역사인식
2. 도쿄재판의 한계
3. 아시아에 대한 우월의식의 잔존
4. 피해자 의식의 만연
Ⅳ. 결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이는 다시 말해서 신도가 일반 종교와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도의 국민교화 정책은 일반 교육제도 안으로 흡수되고 결과적으로 형태상 · 명목상의 정교분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으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전쟁이 종결되었고 일본은 GHQ의 간접통치를 받게 되었다. GHQ의 초기 대일정책의 목표는 일본에 있어 정치 · 경제 · 사회적인 제도에 민주화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점령정책은 종교분야에 대해서도 동일했으므로 전쟁수행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전 천황제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했던 국가 신도를 해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GHQ는 전전의 국가 신도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군국주의적 정신을 깃들이게 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국주의자와 초국가주의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는 결론 하에 특히 메이지 정부 수립이후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 건립된 신사, 그중에서도 국가신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야스쿠니신사와 각지의 호국신사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점령군의 지령에 의해서 국가신도가 폐지되기까지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국가신도라는 국교와 다름없는 체계 속에서 군국주의의 중심적인 역할을 다하던 장소였던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 신도 그 자체이며,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국가 신도 특유의 종교적 의례를 제거해 버리면 이미 종교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완전한 국가주의의 전당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와 GHQ측은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 시설로서 남길 것인지 아니면 전몰자 추도라는 기념비적인 시설로서 남길 것인지의 선택 문제를 놓고 절충 작업을 벌였다. 이에 일본은 두 개의 선택지 중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적 시설인 하나의 신사로서 존속시키자는 길을 택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에 의한 전몰자 추대시설로서 유지시키는 길을 폐쇄시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일본 정부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왜 하나의 신사로 존속시키는 길을 택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메이지시대 이래 국가 신도의 역사에서 야스쿠니 신사가 차지해 왔던 커다란 종교적 지위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지 못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종교적 지위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신사로서의 일본 정부의 선택은 이후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의 발판이 됨을 예시해 준다.
참고 자료
노 길호, 『일본의 굴레 야스쿠니 신사』, 문창, 1996
하 영선 편, 『한국과 일본』, 나남출판, 1997
양 현혜·이 규태역 大江志乃夫, 『야스쿠니 신사』, 소화, 2001
조 양욱 역 이오키베 마코토외, 『일본외교 어제와 오늘』, 다락원, 2003
김 후련, 「일본인에게 있어서 야스쿠니신사가 갖는 의미」,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학연구 소, 2003
김 준섭, 「역사 인식 문제와 한일 관계:미래를 위한 제언」, 한일관계정상화40주년 국제 학술회의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