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말기 무명문화의 전개와 함께한 변화들
- 최초 등록일
- 2005.12.17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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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면서
1)문익점의 생애
2)목화에 대해
2.본론
1)목화유입이전의 우리나라 복식문화
2)목화유입과 더불어 생겨난 변화
(1)열광적인 수요붐
(2)무명짜기 과정
(3) 겨레문화의 물질적 바탕으로서의 목화
3.결론
본문내용
1. 개요
1) 문익점의 생애와 업적
문익점은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신유학을 수용한 유학자이다. 남평 문씨인 그의 자는 일신이고, 호는 삼우당이다. 그가 원나라에서 가져 온 목화씨가 우리나라의 섬유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그의 명성은 아직도 우리에게 널리 전해지고 있다.
그는 충숙왕 16년(1329)에 경상도 강성현(江城縣: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하여 첫 벼슬로 김해부의 사록(司錄)에 임명되었고, 2년후에는 사간원(司諫院)의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공민왕 12년(1363)에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보고하기 위해삼우당 문익점 영정
서장관(書狀官)으로서 계품사(計稟使) 이공수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듬해에 공민왕을 몰아내기 위해 원나라가 세운 신왕(新王)인 덕흥군(德興君)편에 가담하여 귀국함으로써 역신(逆臣)으로 몰려 관직을 박탈당하고 낙향하게 된다.
그는 고향에서 원나라에서 체류(滯留)할 때 얻어가지고 온 목화씨 열개 가량을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더불어 배양하였는데, 정천익이 뿌린 목화씨 중 하나가 재배에 성공하여 백여 개의 씨를 얻게 되었고 이 목화씨를 향리에 두루 나누어 주어 목화재배를 권장하였다. 그후 그의 이러한 유학자적인 실천과 면화보급의 공로가 중앙정계에 알려지면서 우왕 1년(1375)에 전의주부(典儀注簿)라는 벼슬로 다시 관계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이성계의 오른팔인 조준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됨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설에는 참여치 않게 되었다.
그는 1398년에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행적은 세월이 흐를수록 재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업적은 후대의 학자들이 ‘衣被生民之功’이라고 표현했듯이 무엇보다도 면화를 보급해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힌 그의 실천적인 면에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