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한국 근대 종교의 동향
- 최초 등록일
- 2005.12.28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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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근대 종교의 민족주의 역사의식과 관련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한국 근대시기의 제반 상황
3. 근대 한국 유∙불∙선, 기독교계의 동향
4. 동학의 발생과 사회변동에 대한 대응
5. 대종교와 항일무장독립운동
6. 마치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한국사회는 19세기 중반에 들어 ‘전통’과 ‘근대’의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문명의 달성’과 ‘민족정체성의 유지’라는 이중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한국사회와 사상계는 이 같은 전통과 근대의 갈등 상황에 대하여 거부형, 선별적인 수용형(동도서기론), 급진적∙전면적인 수용형(개화당)의 세 가지 흐름을 보여주었는데, 개항 이후 개방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개항기 후반기로 볼 수 있는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서구 ‘근대성’의 수용이 당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사회문제와 관련하여 근대 한국 종교계의 동향은 어떠하였을까.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신흥민족종교인 동학과 대종교의 동향을 고찰해 보겠다.
2. 한국 근대시기의 제반 상황
한국의 근대시기는 봉건적 모순이 심화, 확대되면서 이를 시민의식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식민지적 모순에 빠졌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볼 때는 서구에서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부르주아혁명을 완수한 후, 해외에서 원료를 획득하고 상품시장을 구하려는 제국주의의 팽창단계이다. 이 서세동점하는 세계사적 조류속에 일본은 1854년 미국∙영국에 의해 개항하였고, 1860년 중국은 영∙불 연합군의 북경침입을 위시하여 서서히 반식민지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있어서 외세의 위협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이를 내부에서 극복할 만한 정치적 역량과 물적 토대가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 무렵 과거제도의 혼란, 매관매직의 만연, 법도와 기강의 문란 등으로 봉건왕조의 말기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삼정문란은 농업경제의 생산력을 극도로 저해함으로써 민족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억제하였다. 특히 삼정 가운데 전정의 문란으로 원래 국가소유의 토지가 점차 사유화되고 심지어 토지수탈이 빈번하였다. 환곡은 지방토호들의 고리대금 착취수단으로 전락하였고, 군사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까지 군포세가 내릴 정도였다. 이러한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와 지방토호들의 착취는 농업재생산의 기반을 쇠잔시키고 나라의 경제 자체를 흔들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