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비평]현대비평의 이해
- 최초 등록일
- 2006.01.03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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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 비평의 이해> 수업에서 함께 토론할 주제 6주차의 레포트입니다.
참고하세요. ^^
목차
1.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와 ‘대구 정신’과의 관련성 이해
2. 백석의 시 <모닥불> 과 이시키와 타쿠보쿠의 영향
3. 이상화와 백석의 생애에 관한 해설
4. 우리 민족사에서 일제 강점기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
5. 백석의 시에 나타나는 북방정서의 문제, 이상화의 시정신 형성기에서 국토방랑이 가져다준 영향성
본문내용
백석은 평북 정주가 고향이다. 그가 다닌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소월도 다녔으므로 선배 소월을 퍽 동경하였다고 한다. 백철에 의하면 35년대의 작가들이 지방색, 지방성을 사용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하면서 서정주와 백석을 드는데, 왜 35년대 작가들이 지방색, 지방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았는지 말하기는 어려우나 시인들이 고향을 떠나서 생활하고 또는 유랑하는 시인들이 많아졌음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백석 또한 그의 시에서 수 없이 그의 고향을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마 내 고향을 아끼며 또한 쉽게 가보지 못하는 아늑한 보금자리, 그러한 고향을 늘 가슴 속에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꿈이 선생님이었을 만큼 소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백석은 평안도 방언과 순수함, 그리고 민속에 깔린 시작방법을 사용하였고, 동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작이 시인과 시 정신을 알아내는데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영문학을 공부한 그가 시 속에 순수한 우리 삶을 그려낸 것은 삶의 시학이며 생명의 시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그가 19살 때 1930년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신문사의 후원으로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의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문학에 심취하게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필명을 `이시카와(石川)`에서 따왔고,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는 `백석이 팔베게를 하고 그의 시를 많이 읽어주었다`고 회상한다. 이시카와는 그는 당시 강화되어 가던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 - 군인칙유(軍人勅諭)(1882),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아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이는 백석의 소담한 희망과도 일치하는 직업이다. 또 이시카와는 그 뒤 별다른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 세츠코도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시인은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업어보고 너무나 가벼워진 어머니가 애처로운 나머지 세 걸음을 걷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시카와의 삶은 궁핍했다. 그는 너무나 궁핍하게 산 나머지 폐결핵에 걸렸고,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인의 어머니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의 아내 세츠코도 그 이듬해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시는 데뷔 초엔 젊은이의 이상을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표현해 갈채를 받았지만 죽기 몇 년 전부터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민중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아마도 그 민중적 경향의 시에 백석이 영향을 받지 않았을 까 한다. 일본문학사에서는 그를 메이지 시대의 편협하고 관념적인 단가(短歌, 하이쿠)의 성격을 서민의 애환이 깃든 생활적 주제, 민중적 경향으로 해방시킨 최초의 시인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다니던 회사로부터 해고까지 당했던 백석이 그를 좋아했던 것은 어찌 보면 정말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해방기 한국 시문학사>, 김용직, 民音社, 1992
<한국의 대표 시인론>, 이탄, 문학아카데미, 1994
<시정신을 찾아서 : 이동순 평론집>, 이동순,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8
<민족시의 정신사>, 이동순, 창작과비평사, 1996
<尙和와 古月>, 백기만, 靑邱出版社, 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