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일반적인 짜집기가 아니라, 제 견해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참고하시면 좋을것같네요~
목차
Ⅰ.서론
Ⅱ.본론
1. 사화와 당쟁의 개념 구분
2. 사림과 훈구의 형성 배경
3. 사화의 전개
4. 붕당의 형성 배경 및 전개
5. 탕평책의 실시와 그 의미
6. 현대 정치에의 시사점 및 의미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흔히 일본의 식민 사관 학자들은 조선이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조선 중기부터의 당쟁으로 변질된 붕당 정치로 보고 있다. 그들은 붕당 정치를 파벌 싸움으로만 간주하여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 통치는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록 붕당 정치가 후반에 가서는 세력 싸움과 소모적인 논쟁으로 변질되긴 하였지만, 그 역사적 성립 배경이나 의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와 당쟁은 그 시대의 권력 투쟁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조선시대의 근대화의 맹아를 보여주는 예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이 식민사관 학자들이 당파 싸움에 치중해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옳지 못한 지적이라는 생각이다. 당쟁과 사림의 성장(물론 세력을 가르고, 편을 나누는 것은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붕당 정치는 오히려 이전까지 중앙 집권의 통제된 향리형 정치 문화에서 신민형 정치 문화로 발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향리형 정치 문화란 정치적 역할이 미분화된 전근대적 전통 사회에서 발견되는 유형이다. 이 유형의 구성원들은 정치에 대해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정치를 참여하는 데에도 소극적이다. 이에 신민형 정치 문화는 중앙 집권적인 권위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형의 구성원들은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의식도 존재하고, 정치에 어느 정도는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즉 조선 후기 정당 정치는 붕당이라는 정치 공동체를 통해서 (물론 현대의 민주 정치처럼 완전한 참여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비해 정치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조선 후기 붕당 정치에서 신하들은 물론 왕권에 복종하여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은 붕당을 통해 정치에 대해 간접적인 참여를 할 수 있었다. 신하들은 의견을 건의하고, 왕의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에 상소를 올리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참여는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신민형 정치 문화는 과거 정치라는 개념을 분화시킴으로써 신하들에게 정치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고, 참여 의식을 갖게 해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시대 후기의 붕당 정치를 세력 싸움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당파 싸움이 있었던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붕당 정치가 조선시대 정치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점이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현대의 민주 정치는 정당 정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정당은 의회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우려 속에 국민들의 신뢰마저 잃어가고 있다. 비록 조선 붕당과 현대의 정당은 성립 과정부터 매우 상이하지만, 조선시대의 붕당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조선 중기 정치 제도의 모습을 고찰하고, 붕당 정치가 현대 정치에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 연구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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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정치세력과 정치운영』, 사비평사1992
-이성무 『조선후기 당쟁사에 대한 제설의 검토』, 일조각 1999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 1』, 동방미디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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