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 최초 등록일
- 2006.02.16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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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 모든것에 대하여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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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박제가의 북학의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박제가는 조선후기의 실학자로서 북학의의 저자이다. 자는 차수(次修, 在先, 修其) 등이고 또 호는 초정(楚亭, 貞蕤, 葦杭道人) 등이었다. 본관이 밀양인 그는 1750년(영조 26) 2월 5일 승지 박평의 서자로 삶을 시작하였다. 유년기를 서울 남산골 아래서 보낸 그는 2세 때 부친을 여윈 뒤로는 어머니의 삵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빈한한 생활 때문에 이곳 저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자라났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그를 공부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였다. 훗날 그는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해보니, 가난하게 살면서 10여년 동안 성한 옷을 입어보지도 못하고, 또 입에 맞는 음식도 먹지 못하면서, 밤을 새워 삯바느질을 하여 아들을 공부시켰다. 아들이 사귀는 사람 가운데 가끔 선생과 장자, 그리고 당세의 명사가 있으면 반드시 그들을 애써 불러들여 술과 안주로 대접하였으므로, 그 아들을 본 사람은 그 집이 가난한 줄을 몰랐다(「박제가 소전」).”
그는 19세 때부터 박지원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련하면서 처음으로 실학을 접하게 되었으며, 23세 때는 「초정집」이란 스스로의 문집을 내놓을 만큼 세련된 문필가로 성숙하였다. 이후 당대의 실학자이던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교유하면서 1776년(영조 52년) 4인 합작 시집인 「건연집(巾衍集)」을 발표하여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초정은 조선의 4대 시문(詩文)의 한사람으로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들의 시는 이른바 「사가시(四家詩)」로서 연경에서부터 명성을 날릴 정도로 박제가는 시인으로서도 천재적인 재질을 가졌다. 이들의 스승과 친구로서의 만남은 실로 세상에 드문 놀라운 일이었다. 젊은 박제가는 이 때부터 당대의 유명한 실학자들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꿈많던 20대를 한 그룹으로 보냈으며, 이때의 공동연구가 이후 이들을 북학파로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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