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통신사
- 최초 등록일
- 2006.03.16
- 최종 저작일
-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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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 관련 교양 리포트입니다.
목차
1. 조선통신사의 정의와 역할
2. 조선통신사의 방일경로
3. 통신사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
4. 통신사가 본 일본
본문내용
①조선통신사의 정의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2. 조선통신사의 방일경로
통신사는 원칙적으로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에게 파견한 사절로, 이들은 조선국왕의 국서와 예물을 지참하였으며, 모두 ‘통신사’의 명칭을 사용했다.(초기 3회는 회답겸쇄환사). 그리고 사절단의 삼사(정사․부사․서장관)는 중앙의 관리로 임명했으며, 전기와는 달리 회례나 보빙의 의미가 아니라 막부장군의 습직이나 양국간의 긴급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통신사의 편성과 인원은 각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0명에서 500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통신사의 여정을 보면, 일행이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대략 2개월정도가 걸렸다. 통신사일행은 긴여행에 앞서 국왕으로부터 환송연을 받았으며, 그것이 끝나면 각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작별을 하였다. 8개월내지 2년이나 걸리는 긴여정이었고, 또 바다를 건너야하는 위험부담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는 듯한 이별이었다. 그래서 중도에서 여러차례 연회가 베풀어졌다. 처음에는 충주․안동․경주․부산의 4개소에서 베풀어졌으나, 민폐 때문에 후에는 부산 한곳에서만 베풀었다. 부산에 도착해서는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냈다.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낸 통신사는 국서를 받들고, 기선 3척과 복선 3척에 나누어 타고, 호위하는 대마도선단의 안내를 받아, 대마도 좌수내에 도착한 후, 대마도주가 있는 엄원의 부중으로 갔다. 그곳에서 대마도주의 영접을 받은 후, 다시 이정암(以酊庵)의 장로 2인의 안내를 받아 一岐 - 相島 - 地島를 거쳐 下關을 거쳐 瀨戶內海로 들어선다.
참고 자료
없음